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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vemiri  (2013-01-19 00:01:35, Hit : 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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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상팔국전투와 김해대성동고분군
포상팔국전투와 김해대성동고분군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의 기록과 『삼국유사』 「피은편」 「물계자전」의 기록을 시간 순서에 맞춰 정리를 하여보자.

a)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六年(서기201년) 春二月 加耶國請和

b)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十四年(서기209년)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c-1)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㮈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是役也, <勿稽子>有大功, 以見憎於王孫, 故不記其功.
c-2) 『삼국유사』 「피은편」 「물계자전」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서기212년) 保羅國[今固城] 史勿國[今泗州] 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㮈音 將軍一伐等 率兵拒之 八國皆降 時勿稽子軍功第一 然爲太子所嫌 不賞其功
c-3)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十七年(서기212년) 春三月 加耶送王子爲質

d-1)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d-2) 『삼국유사』 「피은편」 「물계자전」 二十年乙未(서기215년) 骨浦國[今合浦也]等 三國王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今蔚州]王親率禦之 三國皆敗 稽所獲數十級 而人不言稽之功
d-3)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二十年(서기215년) 기록 없음

위에 보인 것처럼 d-1)과 d-2)는 표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은 시간 정보를 알 수 있는 기록이 하나도 없어 이 기록만으로는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나해왕의 제위 년수와 年干支가 붙어있다. 이것이 일연이 참조한 원사료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일연이 붙여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해이사금 재위 20년은 분명 乙未이고 이는 서기 215년이다. 이는 『삼국사기』 「연표」를 펼쳐보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는 c-1) c-2)를 살펴보면 내용상 차이가 좀 발견된다. 『삼국사기』는 八浦上國이 阿羅國을 침공하자 신라가 王孫 㮈音을 사령관으로 보내 阿羅國을 구원을 했다는 내용이고, 『삼국유사』는 保羅國 史勿國 等八國이 변경을 침략하자 太子 㮈音을 보내 八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두 사건은 분명히 d-1)과 d-2)보다 3년 전의 사건을 전하는 것이므로 이 두 기록은 동일한 사건의 다른 측면으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삼국사기』의 기록은 阿羅國 구원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라변경 침공에 초점을 맞춘 기록으로 이해하면 큰 문제가 없다. 즉 阿羅國이 신라에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阿羅國과 新羅의 연합이 형성되어 八浦上國과의 전쟁이 阿羅國을 넘어 신라의 변경까지 확대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확인할 것이 있다.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十二年(서기207년), 春正月, 拜王子<利音>[或云<奈音>.]爲伊伐湌, 兼知內外兵馬事.

『삼국사기』 「물계자전」의 ‘王孫 㮈音’은 위 12년조의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王子 奈音’의 誤記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해왕 14년(서기 209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浦上八國이 加羅를 침공하자 加羅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신라는 太子 于老와 伊伐湌 利音을 사령관으로 하여 浦上八國을 패퇴시켰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c-1), c-2)와 b)의 두 기록은 비슷한 사건을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먼저 전쟁 당사자의 국명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b)는 加羅 c)는 阿羅國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한 사령관으로 b)는 太子 于老와 伊伐湌 利音으로 c-1), c-2)는 太子 㮈音으로 되어 있어 太子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편린들 속에서 역사적 사건의 실체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그 기록된 사건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일치하여야 하며 또 인간의 행위까지도 일치해야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물계자전」에 보이는 아라국을 가라국의 오기로 보고 두 기록을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역사연구방법이 아니다. 그러니 진실된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三國志』 「東夷傳」 「한전」에서 한 문장을 옮겨서 좀 더 살펴보자.

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 踧支濆, 臣離兒不例、拘邪 秦支廉 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 中郎將都尉、伯長侯。

바로 위 기록이 포상팔국전투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제3자의 기록이다. 위 기록은 진왕과 安邪의 신지, 拘邪의 신지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3세기 중반 한반도의 정세를 좌지우지하던 실세 중의 실세들을 진수가 기록해 놓은 것이다. 위 기록에서 『삼국사기』의 加羅국은 『三國志』의 拘邪에 대응하며 『삼국사기』의 阿羅국은 『三國志』의 安邪에 대응한다.

『三國志』 「東夷傳」 「한전」에는 安邪와 拘邪를 변한 12개국의 일부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변한 12개국과 진한12개국을 다스리는 왕이 辰王(『삼국사기』의 석씨왕)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위 기록은 安邪와 拘邪는 臣智가 다스리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魏는 그 변한의 신지에게 魏率善邑君 歸義侯와  中郎將都尉 伯長侯라는 관작을 내려주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 安邪와 拘邪의 臣智는 魏를 이용하여 신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3세기 전반기의 한반도 남부 상황을 기술해 놓았고, 『三國志』 「東夷傳」 「한전」은 3세기 중반부의 한반도 남부 상황을 기술해 놓았다. 3세기 전반부의 기록은 큰 전쟁을 3세기 중반부의 기록은 전쟁이 끝난 이후 신라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두 기록은 칼과 칼집처럼 정확히 일치한다.

이제 전쟁의 推移를 감상해 보자.
1. 서기 201년 加耶國이 신라에 和를 청함.
2. 서기 209년 浦上八國이 加羅를 침공하자 加羅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함으로 加羅와 신라의 연합이 형성되고 浦上八國장군을 擊殺함
3. 서기 212년 八浦上國이 阿羅國을 또 다시 침공하자 阿羅國이 또 다시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八國을 격파함
4. 서기212년 春三月 加耶가 王子를 보내 質로 삼음
5. 서기 215년 骨浦, 柒浦, 古史浦 三國이 竭火城을 來攻하였으나 왕이 직접 군사를 몰고 나가 전쟁을 승리로 이끔

아마 실질적인 전투는 서기 212년 加耶가 왕자를 질자로 보냄으로써 끝이 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년 뒤 加耶의 잔당인 骨浦, 柒浦, 古史浦 三國이 마지막으로 신라를 공격하다 실패함으로써 加耶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어!!  제 말에 어폐가 있다구요.
「신라본기」의 “加耶 = 八浦上國 + 加耶國 + 阿羅國 + 그 외 α” 즉 「신라본기」에 보이는 加耶가 바로 『三國志』에 보이는 변한12개국을 다스리는 優由國임을 이해하는 순간 역사의 진실이 보일 것입니다.









잡담 : 그럼 이제 拘邪로 비정되는 김해지역의 땅속을 들여다보자. 그곳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아마 拘邪국의 신지가 신라와의 연합을 통하여 加耶의 실세로 등극을 하였을 테고, 魏와의 교류를 통하여 사방팔방의 진귀한 물건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득권은 죽 지속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아마 그들이 광개토대왕이 남정을 할 때까지 호사를 누렸을 것으로 추측한다.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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