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과 관련하여,.. #2 포상팔국전투
‘포상팔국 전투’ 또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연장선에서 연구가 이루어져왔다. 그래서 급기야 기년을 조정하여 4C 전반의 사건으로 이해한든지 또는 기년을 대폭 늦춰 나해이사금代의 사실이 아니라 진흥왕代의 사실로써 6세기 전반 백제의 한반도 남부지역인 가야지역으로의 진출로 파악하는 시각까지 있다. 이와는 달리 기년을 그대로 신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국가 형성 단계니’, ‘사로국의 소국병합이니’하여 영토 확장과 연결시켰지만 그 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浦上八國의 공격을 받은 加羅를 김해지방(대성동 고분군)으로 비정하고 3세기 이후에도 찬란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광개토대왕의 남정이후(4말5초)에 유물의 규모나 출토량이 확연히 적어진 것을 근거로 3세기에 김해지방이 쇠퇴했거나 힘이 약해져서 신라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견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고학적 근거를 통하여 김해지역을 기반으로 하던 ‘하나의 나라’가 이때 멸망하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사실 한 지역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그 유물이 시기적으로 언제 적 유물인지부터 판단한다. 그리고 유물의 시기가 확정되면 그 당시의 역사기록을 살펴보아야한다. 사실 한국고대사의 기본문헌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삼국시대의 유물이라 판명이 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하여 그 유물과 관련된 사실을 유추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에 큰 문제가 있다. 바로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자신의 가설과 문헌기록 즉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배치될 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불신해버린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문헌사학을 고고학이라는 흙구덩이에 쳐박아 버리는 행위이며, 이것을 역사연구의 아주 큰 병폐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측면은 『三國志』 「위지」 「東夷傳」에 기인한다. 즉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초기기록의 불신은 바로 『三國志』 「위지」 「烏丸鮮卑東夷傳」 「한전」의 誤譯이 일차적인 원인이며, 또 자신의 가설과 타당하지 않다면 그 부분에 대하여 변경해석을 하는 것이 그 두 번째 원인이다. 이러한 것들이 시정되지 않는 한 우리의 고대사를 바로 보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앞서 필자는 『三國志』 「위지」 「烏丸鮮卑東夷傳」 「한전」의 재검토를 통하여 3세기 한반도의 남부상황을 충분히 설명하였다. 3세기 한반도의 남부는 辰王이 다스리며 그가 다스리는 영역이 ‘진한12국 + 변한12국 + 月支國과 나머지 마한지역의 일정부분’이라는 것을 『三國志』 「위지」 「烏丸鮮卑東夷傳」 「한전」을 통하여 밝혔다. 그렇다면 辰王은 언제 ‘변한12국’을 병합하였는가?
포상팔국과 관련된 원사료
포상팔국과 관련된 원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두 군데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14년조와 「열전」 「물계자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피은편」 「물계자전」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六年(서기201년) 春二月 加耶國請和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十四年(서기209년)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浦上八國이 加羅를 침입하려고 하자 加羅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于老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해 6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어, 八國의 將軍을 공격해 죽이고 포로로 잡혔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十七年(서기212년) 春三月 加耶送王子爲質
「열전」 「물계자전」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㮈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是役也, <勿稽子>有大功, 以見憎於王孫, 故不記其功.[이때 포상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아라국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나음에게 근군 및 6부의 군사를 주어 그들을 돕게하여 마침내 여덟 나라의 병사를 격파하였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으나 왕손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에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중간 생략>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그 뒤 3년이 지나 골포, 칠포, 고사포 등 세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갈화성을 침공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파하였는데, 물계자가 수십여 명을 잡아 목베었으나 공을 논할 때 또한 소득이 없었다.]
다음은 『삼국유사』 「피은편」 「물계자전」의 기록이다.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서기212년) 保羅國[今固城] 史勿國[今泗州] 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㮈音 將軍一伐等 率兵拒之 八國皆降 時勿稽子軍功第一 然爲太子所嫌 不賞其功 [제10대 柰解王이 즉위한 지 17년 壬辰에 保羅國, 古自國(지금의 고성), 史勿國(지금의 사주) 등 八國이 힘을 합쳐 변경을 침범해 왔다. 왕은 태자 㮈音과 장군 一伐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八國이 모두 항복했는데 이때 물계자의 軍功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그 상을 받지 못했다. <중간 생략>
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等 三國王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今蔚州]王親率禦之 三國皆敗 稽所獲數十級 而人不言稽之功 [20년 乙未에 골포국(지금의 合浦) 등 三國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굴불인 듯하다. 지금의 울주)를 침범하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이를 막으니 三國이 모두 패했다. 물계자가 죽인 적병이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이하 생략>
잡담 : 최근 들어 좋은 소식이 많이 들리네여. 며칠 전에는 손보기본 『삼국유사』가 공개되었지여. 저는 개인적으로 그 『삼국유사』가 영인되어 출판되기를 고대하고 있어여. 혹시 연세대 박물관에서 이미지화일이나 pdf화일을 만들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도 해보고,.. 그리고 고구려 석비도 하나 발견되었는데 글자를 확인할 수 있는 선명한 탁본이나 사진이 공개되기를 기다리고 있어여. 얼마 전 경주 드림센터에서 제6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를 하였는데 그 때 그 곳에 참관하여 새로 발견된 고구려석비 이야기를 처음 들었어여. 발표자로 참가한 중국 北京大 宋成有교수가 이야기 할 때 깜짝 놀랐어여. 宋교수가 이야기를 하니 우리 측 발표자들 중에 어느 분이더라 그분은 실물을 보려고 벌써 중국을 다녀왔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여.
다시 추워졌네여. 다들 감기조심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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