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와 송서에 기록된 고구려, 백제, 왜왕의 책봉명 #1
중국 정사의 기록 속에서 중국 황제의 책봉 기록을 살펴보면, 처음으로 삼국지에서 확인이 된다.
倭人전에 景初2年(A.D.238) 6月 卑彌呼가 大夫 難升米等 등을 보내서 朝獻한 후, 그 해 12月에 魏明帝가 親魏倭王으로 삼은 기록이 그 것이다. 그리고, 濊전에는 正始6년(A.D.245)의 전쟁에서 不耐侯의 항복을 받은 후, 正始8년(A.D.247) 不耐侯의 조공을 계기로 不耐濊王으로 삼는다.
이러한 기록을 제외하고 부여, 고구려의 역대 왕들이나 진한의 진왕[삼국사기의 신라왕] 그리고 마한 등에 대하여 책봉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의 기록에 이어서 晉書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이, 馬韓 등의 수많은 조공, 내부, 귀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帝紀第九에 백제에 대하여 2번 책봉을 한 것을 제외하고,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晉書 卷九 帝紀第九 簡文帝 孝武帝
簡文帝 昱 : 咸安二年(372년)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孝武帝 曜 : 太元十一年(386년) 夏四月,以百濟王世子餘暉為使持節都督鎮東將軍百濟王。
진서 다음의 중국정사는 송서로 이어지는데, 宋書 夷蠻전을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송서의 기록은 고구려, 백제, 왜왕을 책봉했다는 기록이 가득 차 있다.
먼저 고구려의 기록을 보자.
宋書 卷九十七 列傳 第五十七 夷蠻 東夷
東夷高句驪國, 今治漢之遼東郡. 高句驪王 高璉, 晋安帝 義熙九年, 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 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高祖踐阼, 詔曰: 「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璉, 使持節·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映, 並執義海外, 遠修貢職. 惟新告始, 宜荷國休, 璉可征東大將軍, 映可鎭東大將軍. 持節·都督·王·公如故.」 三年, 加璉散騎常侍, 增督平州諸軍事. //이하 생략
고구려전은 ‘東夷 高句驪國은 현재(今) 漢代의 遼東郡을 다스린다.’로 시작하고 있다. 漢代의 遼東郡이 어디인지 알려면 漢書를 보면 된다.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참고
漢書 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遼東郡,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襄平。新昌,無慮,望平,房,候城,遼隊,遼陽,險瀆,居就,高顯,安市,武次,平郭,西安平,文,番汗,沓氏。
그리고, 晋安帝의 義熙九年(A.D 413년)의 기록이 이어지는데, 그 기록에는 璉을 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으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계속하여 그 뒤 조서의 내용을 보면 百濟王 映에게는 使持節·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 호칭한다.
송서 백제전을 살펴보면,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義熙十二年(416), 以百濟王餘映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高祖踐阼, 進號鎭東大將軍. 少帝 景平二年(424), 映遣長史張威詣闕貢獻. //이하 생략
백제의 위치를 기록한 후 遼西略有 기록이 있고, 義熙十二年(416년)의 기록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百濟王 餘映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오늘 살펴볼 내용은 바로 이 책봉명에 대한 분석이다.
정리를 해보면
진서
餘句 : 鎭東將軍領樂浪太守
餘暉 : 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
송서 고구려전
璉 : 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 征東大將軍, => 三年 뒤, 散騎常侍, 督平州諸軍事
映 : 使持節·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 鎭東大將軍
송서 백제전
餘映 :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책봉명을 조금 살펴보면 璉에게 營州諸軍事, 樂浪公, 平州諸軍事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위에 송서 고구려전의 전부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살펴보면, 少帝 景平二年(424)의 營平二州諸軍事, [大明]七年(463), 平營二州諸軍事 등을 계속 발견할 수 있다. 또, 진서는 백제의 餘句에게 樂浪太守라는 표현을 하였지만, 餘暉, 餘映에게 使持節都督鎭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하는데, 餘映에게는 百濟諸軍事라는 표현이 더 있다. 필자는 이러한 기록이 의미하는 바를 고구려나 백제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영역에 대한 晉이나 宋측의 공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구려의 경우 ‘東夷高句驪國, 今治漢之遼東郡’의 상황이 책봉명 속에 營州, 平州 또는 營平二州諸軍事라는 표현으로 나타났다고 파악한다. 예전 漢之遼東郡이었던 지역이 이제 완전히 고구려의 영역이니 더 이상 曰可曰否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좀 더 후대의 사서인 위서 고구려전의 일부를 살펴보자.
魏書 卷一百 列傳第八十八
世祖時,釗曾孫璉始遣使者安東奉表貢方物,並請國諱。世祖嘉其誠款,詔下帝系名諱於其國,遣員外散騎侍郎李敖拜璉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고구려왕 璉의 책봉명에 ‘遼海諸軍事, 遼東郡開國公’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遼海라는 것도 발해만 북단의 요동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표현 또한 魏가 예전 漢之遼東郡이었던 지역이 이제 완전히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으니, 더 이상 曰可曰否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번에는, 樂浪公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위의 고구려전에 인용된 고조의 조서를 보면, 그 말미에 ‘持節·都督·王·公如故’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기록에 王과 公이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高句驪王·樂浪公이라는 표현은 ‘고구려왕이면서 낙랑공’이라는 뜻으로, 고구려왕이라는 것은 당연히 고구려를 지배하는 ‘최고통치자인 왕’을 말한다. 그에게 낙랑공이라는 표현을 더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예전 고구려의 땅이 아니었던 대동강유역의 낙랑지역을 차지하여, 실질적으로 지배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점은 후대 신라왕에 대한 책봉명으로 낙랑군공같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낙랑은 요서로 옮겨가기 전의 대동강 유역의 낙랑임이 명확해 보인다.
참고///////
新羅王에 대한 책봉 기록은 수서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隋書 卷八十一 列傳第四十六 東夷 新羅
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高祖拜真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후대의 기록이지만 양서 고구려전을 보면
梁書 卷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高句驪
以句驪王安爲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
삼국사기
고국원왕 二十五年, 春正月, 立王子<丘夫>爲王太子. 冬十二月, 王遣使詣<燕>, 納質修貢, 以請其母. <燕>王<雋>許之, 遣殿中將軍<刀龕{刁龕}>,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使, 封<樂浪>公, 王如故.
///////참고 끝
중국정사의 기록을 보면 漢족이 동이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가 가장 넓었던 시기가 漢나라 시절이며, 그 당시 한반도 북부에는 한의 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토)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그 4군지역을 자신들의 고유영역으로 인식하였으며, 각 왕조마다 군사를 파견하여 동이족(예, 맥, 한)과의 군사적인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현토군은 고구려에 의하여 일찍 요동으로 물러났으나, 樂浪은 4세기 초까지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존치되어 있다가 결국 고구려에 의하여 대방군과 같이 축출을 당한다.(낙랑 313년, 대방 314년) 그 후 鮮卑族 慕容氏가 지배하던 요서지역으로 옮겨진다. 이제 고구려는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낙랑이라는 표현은 진서에 기록된 百濟王 餘句의 책봉명에서 먼저 나타난다. “咸安二年(372년)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아마 백제가 어느 시점에 고구려가 접수한 대동강유역의 낙랑지역 中 전부나 일부를 자신들의 영토로 획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이어지는 송서의 백제왕에 대한 책봉명에는 樂浪이 보이지 않는다. 이점을 좀 더 상세히 고찰하려면,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후일로 미룬다.
결국 고구려의 왕의 칭호에 營平二州諸軍事, 樂浪公 등의 표현은 강성한 고구려가 역대 중국왕조나 여타 주변국과의 힘의 대결에서 획득한 영역에 대한 중국왕조의 公認으로 이해함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고구려왕이 책봉을 받는 행위와 고구려가 차지한 영토를 중국왕조측이 인정하는 빅딜로 보여지며, 고구려는 영토라는 實利를 얻고, 중국 왕조측의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후왕으로 인식하는 명분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그 당시 고구려와 중국 왕조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하는 거대한 원동력이 된다.
이와는 달리 백제의 경우는 아래와 같다.
진서의 기록을 보면 ‘(咸安)二年(372년)春正月 百濟遣使貢方物’이 이루어진 이후 그해 六月에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太元九年 秋七月) 百濟遣使來貢方物’이 있고 난 후, 그 다음해(386년) 夏四月에 百濟王世子餘暉을 使持節都督鎮東將軍百濟王으로 삼는다.
이러한 모습은 먼저 백제가 遣使하고, 그 후 일정시간이 경과한 후 晉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있다. 예전 비미호가 스스로 魏로부터 親魏倭王을 얻어 내는 과정과 비슷하다. 백제 또한 비미호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으로 책봉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백제왕에게 기록되어 있는 百濟諸軍事라는 표현을 살펴보면,
송서나 남제서의 백제전을 보면 백제의 왕이 남조에 요청하여 공훈이 있는 장군들에게 王, 侯, 太守 그리고, 여러 將軍 호를 얻어주는데,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의미로 百濟諸軍事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결국 백제왕은 자국내부의 사정을 타파하는 방편으로 중국 왕조측에 책봉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는 수서에 이를 때까지 중국왕조로부터 한 번도 책봉을 받은 기록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이번에는 倭國을 보죠.
송서 왜국전
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世修貢職。高祖永初二年(421년),詔曰:「倭贊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太祖元嘉二年,贊又遣司馬曹達奉表獻方物。贊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表求除正,詔除安東將軍、倭國王。珍又求除正倭隋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詔並聽。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並除所上二十三人軍、郡。濟死,世子興遣使貢獻。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籓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順帝升明二年,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於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鹹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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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永初二年(421년)이나 太祖元嘉二年(425년)에 왜왕 贊이 유사를 파견했을 때는 책봉기사가 없다. 贊이 죽고 난 후,동생(弟) 珍이 왕위에 오른 후 珍이 自稱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을 요구했으나, 송에서는 安東將軍、倭國王을 내린다.
왜는 贊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책봉을 요구하지 않았는 것으로 보아, 425년에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가 책봉된 사실을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珍이 自稱하여 작위를 내려 줄 것을 요구한다. 珍이 요구하는 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음에 계속,....
ver. 0.0.000. 1644
잡담 : 날씨가 많이 춥네요. 다들 건강 조심 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