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쓴 이  
   livemiri  (2013-05-28 20:55:52, Hit : 0, Vote : 0)
연 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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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箕子朝鮮의 실존에 대하여 I
箕子朝鮮의 실존에 대하여 I






일반적으로 ‘古朝鮮’이라 하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古朝鮮은 『三國遺事』 「古朝蘇」조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壇君조선(즉 王儉朝鮮)에 대한 異稱으로 箕子나 衛滿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래서 古朝鮮을 단군, 기자, 위만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잘못된 사고이다. 또, 한국의 연구자들 사이에는 壇君의 실존을 긍정하는 경우도 제법 있지만, 앞서 필자가 古朝蘇에 관한 최고의 기록인 『三國遺事』를 분석하여 밝혀 놓았듯이 古朝蘇이나 壇君은 실존하지 않았던 허상의 존재들이다. 사실 중국의 연구자들 거의 대부분은 단군신화의 의미를 한민족의 기원신화로서 인정하는 정도이지 壇君朝鮮의 실존을 인정하는 연구자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단군이나 고조선에 관한 연구를 민족적 감정으로 바라다보고 연구를 한다는 것은 사실관계를 파악하여 역사의 실체를 찾는 측면에서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단군신화는 『三國遺事』 「古朝蘇」조에 『古記』를 인용한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보면 唐高 卽位 50年에 壇君王儉이 平壤城에 도읍하여 朝鮮을 개국한 후, 도읍을 白岳山阿斯達로 옮겼다가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에 周虎王이 卽位한 己卯에 箕子를 朝鮮에 봉하니 壇君은 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阿斯達에 돌아와 1908세에 山神이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古記』에 보이는 箕子가 한국 측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箕子이다. 이 기자와 관련하여 중국 측의 기록은 先秦時代의 문헌에 많이 보이는데, 기원전 12세기경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에 의해서 조선의 왕으로 책봉되었다고 되어 있다.

箕子와 관련된 후대의 기록 중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을 살펴보면, 箕子와 衛滿에 관련된 부분이 언급되어 있는데,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에 보이는 본문의 기록보다 「韓傳」에 인용되어 있는 『魏略』에 좀 더 풍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실 箕子와 衛滿은 韓國 上古史에서 초기국가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東沃沮
漢初,燕亡人衛滿王朝鮮,時沃沮皆屬焉。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


昔箕子既適朝鮮,作八條之教以教之,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其後四十餘世,朝鮮侯淮僭號稱王。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衛滿,魋結夷服,復來王之。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爲四郡。自是之後,胡、漢稍別。


准既僭號稱王,爲燕亡人衛滿所攻奪,[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及秦並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准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准,准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爲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綰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詣准降,說准求居西界,(故)中國亡命爲朝鮮籓屏。准信寵之,拜爲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准,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准。准與滿戰,不敵也。]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准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絕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魏略曰:初,右渠未破時,朝鮮相曆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한국인의 평균수명에 대한 통계자료를 보면 1970년에는 남자가 58.6세, 여자가 65.5세였는데, 2010년에는 남자가 77.2세, 여자가 84.0세로 30년 사이에 근 20세 이상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통계자료가 없는 근대 이전의 경우는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것을 토대로 통계적 추측을 해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여러 연구자들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조선왕들의 수명을 조사해 놓은 자료를 보면 평균수명은 44세 정도이고, 평균 즉위 연령은 24세, 평균 재위기간은 19년 2개월로 나타난다. 이는 보통 중국황제들의 평균적인 재위 기간도 대략 20년 정도와 비슷하다. 이를 통해 조선왕들의 평균수명은 1970년도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15세, 2010년을 기준으로는 35세 정도 짧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경우에도 평균수명이 좀 더 작았으면 작았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평균수명이 44세 정도였다는 것은 한 세대가 대충 20여년 정도라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한 세대를 보통 30년 정도라고 파악하고 있지만 이것을 그대로 고대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濊傳」의 기록에 ‘昔箕子既適朝鮮 ,,,,,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僭號稱王’라는 기록이 있고, 『魏略』에는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이라는 기록이 있다.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에 따르면 箕子의 후손이 40餘世를 지나 朝鮮侯 淮(俊)에 이르러 사사로이 왕이라 호칭하였다고 하였으나 『魏略』에 기록된 바와 같이 準의 아버지인 否도 朝鮮王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淮(俊)에 이르러 처음으로 稱王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인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韓傳」의 주석으로 실린 『魏略』에 보이는 연의 稱王은 易王 10년(기원전 323년)의 일이다. 또 燕이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방 2천 여리를 빼앗아 滿番汗으로 경계를 삼은 시기는 연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昭王(재위 기원전 312년∼279년) 말기 무렵인 기원전 280년경의 일이다. 그러니 朝鮮이 稱王한 것도 대략 기원전 300년경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당하다.

위의 내용으로부터 箕子 이후 그의 후손이 稱王할 때까지 이미 언급한 평균수명과 세대 간의 차이 20여년을 이용하여 四十餘世를 기간으로 환산해 보면 대략 8~900년 정도의 기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원전 300년경에다가 8~900년을 합산해보면 기원전 1100~1200년으로 되어 先秦時代의 箕子 관련 기록과 대략 일치한다.

즉 『魏略』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燕의 동쪽 지역에 존재한 朝鮮이 先秦時代의 문헌에 보이는 箕子와 시간적 선후 관계를 가지는 혈연집단의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에 계속,....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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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이쯤에서 『古記』의 기록을 살펴볼 것이 있다. 『古記』의 기록은 壇君이 요임금과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운 후 1,500년이 지나 주나라 무왕이 箕子를 朝鮮에 봉하였다고 되어 있다. 중국 측 기록을 살펴보면 堯임금의 즉위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 서기전 2300년 전후로 되어 있다. 참고로 하나 예를 들면 『世經』을 저술한 중국 前漢 말기의 학자 劉歆은 堯元年을 서기전 2303년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주무왕이 기자를 朝鮮에 봉한 己卯年은 서기전 1122년이다. 두 사건 사이의 시간 간격은 1200년 정도이다. 그렇다면 고기의 작성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堯임금부터 기자가 朝鮮에 봉해진 己卯年까지 1,500년이라고 하였는지 자못 궁금하다.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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