箕子朝鮮의 실존에 대하여 II – 위만과 險瀆
『사기』 「조선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王險에 대한 주석은 아래와 같다.
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徐廣이 말하길 ‘昌黎에 險瀆縣이 있다.’고 했다.) 韋昭云 「古邑名 應劭注 地理志云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 (韋昭가 이르길 ‘옛 邑의 이름으로 應邵는 地理志에 이르길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 注했다.’고 했다.) 臣瓚云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也」 (臣瓚이 이르길 ‘王險城은 樂浪郡 浿水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계속하여 『한서』지리지에서 험독, 樂浪郡, 조선현에 관련된 주석을 찾아보면, 먼저 요동군에 險瀆縣이 보인다. 이 險瀆縣에 대하여 應劭, 臣瓚, 師古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였다.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應劭가 말하길 ‘조선왕 滿의 도읍이다. 물의 험함에 의지했다. 고로 險瀆이라 한다.’고 했다.)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신찬이 말하길 ‘왕검성은 낙량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것은 당연히[自是] 險瀆이다.’고 했다.) 師古曰 「瓚說是也 浿音普大反」 (師古가 말하길 ‘瓚의 말이 맞다. 浿의 音은 배[普大反]이다.’고 했다.)
그리고 樂浪郡에 대해서는 應劭와 師古의 주석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應劭曰 「故朝鮮國也」 (應劭가 말하길 ‘예전의 朝鮮國이다.’고 했다.) 師古曰 「樂音洛 浪音狼」 (師古가 말하길 ‘樂의 音은 洛이고, 浪의 音은 狼이다.’고 했다.)
또 낙랑군의 조선현에 대해서는 應劭의 주석이 있다.
應劭曰 「武王封箕子於朝鮮」 (應劭가 말하길 ‘武王이 箕子를 朝鮮에 封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燕地’에 기록되어 있는 ‘殷道衰 箕子去之朝鮮’과 관련하여 師古의 주석이 있다.
師古曰 「史記云 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與此不同」 (師古가 말하길 ‘『史記』에 이르길 ‘武王이 紂를 정벌하고, 箕子를 朝鮮에 封했다.’고 했는데 이것과 같지 않다.’고 했다.)
참고 : 『사기』와 『한서』에 주석을 단 사람들을 살펴보면 應劭는 후한 때 사람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韋昭는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이며 생몰년은 204~273년이며, 徐廣은 동진 때의 사람으로 생몰년은 352~425년이다. 그리고 臣瓚에 대해서는 대략 서진(265~316년)대의 인물로 추정되나 불확실하고, 어느 시대 사람인지 그가 누구인지 알려진 바가 하나도 없다. 臣瓚이라는 것도 자신의 이름이 아니고 신 아무개란 뜻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顔師古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학자로 생몰년은 581~645년이다.
이상의 기록들을 주석자에 따라 정리를 해보면 아래와 같다.
應劭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 「故朝鮮國也」 - 한서 지리지 낙랑군 「武王封箕子於朝鮮」 - 한서 지리지 낙랑군 조선현
韋昭 「古邑名 應劭注 地理志云 遼東 險瀆縣 朝鮮王舊都」 - 사기 조선열전 王險
徐廣 「昌黎有險瀆縣也.」 - 사기 조선열전 王險
臣瓚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也」 - 사기 조선열전 王險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 한서 요동군 험독현
師古 「瓚說是也 浿音普大反」 - 한서 요동군 험독현 「樂音洛 浪音狼」 - 한서 지리지 낙랑군 「史記云 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與此不同」 - 한서 지리지 ‘燕地’의 ‘箕子’와 관련하여
이제 이 주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에 앞서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는, 滿이 ‘조선왕에 오르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滿은 燕으로부터 망명하여 패수를 건너 秦의 예전 空地인 上下鄣에 거주하면서 眞番과 朝鮮의 蠻夷 및 옛 燕 齊의 亡命者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王이 되었으며, 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조금 후대의 사서인 『한서』는 『사기』 「조선열전」을 거의 그대로 轉載한 기록이므로 『한서』 또한 별반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후대의 기록인 『삼국지』나 『위략』 등에 보이는 기자나 기자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는 準과의 전쟁 등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應劭는 漢요동군 險瀆縣에 대하여 조선왕 滿의 도읍이라고 주석을 하였고, 漢낙랑군에 대해서는 옛날의 朝鮮國으로, 낙랑군 조선현에 대해서는 武王이 箕子를 朝鮮에 봉한 곳으로 주석을 하였다. 應劭의 주석을 한마디로 줄이면 『사기』나 『한서』의 기록에서 滿은 漢요동군 險瀆縣에 도읍한 것이고, 箕子는 漢낙랑군 조선현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臣瓚은 『사기』 「조선열전」의 王險에 대하여 ‘王險城은 樂浪郡 浿水의 東쪽에 있다.’ 그리고 『한서』 요동군 險瀆縣에 대하여 ‘王險城은 樂浪郡 浿水의 東쪽에 있다. 이것은 당연히 險瀆이다.’라고 주석을 달아 應劭의 주석과는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臣瓚은 樂浪郡 浿水의 東쪽을 滿의 도읍 王險城으로 주석한 것이다. 그리고 당나라 때 학자인 師古가 臣瓚의 말에 찬동하였다.
王險城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지만, 기자가 封해진 朝鮮에 대해서는 諸家의 견해가 漢낙랑군 조선현에 대하여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應劭는 무엇을 근거로 王險城과 朝鮮을 주석하였을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기』 「조선열전」의 본문에는 분명히 滿이 패수를 건너 上下鄣에서 거주한 이후 왕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패수와 上下鄣은 『한서』 지리지 낙랑군에서 雲鄣이라는 단어와 25개의 현 중 浿水縣으로 확인이 된다. 그런데 險瀆은 요동군에 있는 縣이다. 燕과 조선이 동서로 국경을 이루고 있는 형국에서 滿이 패수를 건넜다면 분명 요동군보다도 동쪽이나 동남쪽으로 떨어진 지역이어야 하며 그 곳에서 王險城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應劭는 이와 관련하여 王險城을 주석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依水險 故曰險瀆’ - 물의 험함에 의지했다. 고로 險瀆이라 한다. 즉 應劭는 ‘水險’의 의미에서 險瀆을 유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는 『사기』 「조선열전」의 본문 내용과 전혀 호응하지 않는 비정을 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瀆’이라는 글자에는 ‘큰 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四瀆이라 하면 국가적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성스러운 네 곳의 강을 말한다. 중국의 경우 四瀆은 장강, 황하, 淮水, 그리고 濟水를 말한다. 이처럼 險瀆이라는 명칭도 요동군에 있는 큰 강 근처에 있는 縣의 이름으로 작명된 것이 분명하다.
『사기』 「조선열전」에 滿의 손자 右渠王 때에 이르러 한무제의 침공으로 멸망에 이르는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서 패수를 사이에 두고 전쟁을 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應劭는 이러한 漢과 우거왕과의 전쟁에서 큰 강을 끼고 있는 王險城의 지리적 위치를 통하여 ‘依水險’이라는 이미지를 얻어 險瀆으로 비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應劭는 후한 때 사람이니 분명 『위략』이나 『삼국지』가 편찬되기 이전의 사람이다. 그런데 韋昭는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삼국지』나 『위략』이 편찬된 시대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시기적으로 『위략』이나 『삼국지』를 읽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런데도 그는 『사기』에 주석을 달면서 王險에 대하여 應劭의 주석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것은 箕子와 관련하여 큰 시사를 한다.,..... **
『삼국지』나 『위략』은 滿이 조선왕 準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새롭게 왕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전쟁은 王險城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韋昭는....?
다음에 계속,.... 감사합니다. ver. 0. 0000. 1111
잡담 :
5월의 마지막 날이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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