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피은편의 염불사와 사금갑
항상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말이 되면 가끔 아내와 같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바람도 쐴 겸 가볍게 산을 오르곤 한다. 산을 오르다 보면 의례히 작은 절이나 암자를 만나게 되고, 그 곳에서는 낯익은 염불 소리가 들린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 말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을 念하는 것으로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미천하여 잘 알지는 못하지만, 미타신앙과 관음신앙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지난 목요일(12월 3일) 시간이 허락하여 “제31회 신라문화제 학술회의”에 참관할 수 있었다. “명예보다 求道를 택한 신라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발표자와 토론자 사이에 삼국유사의 避隱편에 대한 학술회의가 진행되었다.
현장에서 자료집을 받고 논문들을 대충 살펴보다, 그 중 경북대 주보돈교수님의 “삼국유사 ‘염불사조’의 吟味”라는 논문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염불사조의 기록과 사금갑조에 보이는 避村, 避里村에 대한 분석 때문이었다.
사금갑조의 기록은 ..南至避村.[今壤避寺村在南山東麓]이다. 그리고 아래는 念佛師조 전문
念佛師 南山東麓有避里村. 村有寺. 因名避里寺. 寺有異僧. 不言名氏 常念彌陀. 聲聞于城中. 三百六十坊, 十七萬戶, 無不聞聲. 聲無高下. 琅琅一樣. 以此異之. 莫下致敬. 皆以念佛師爲名. 死後泥塑眞儀. 安于敏藏寺中. 其本住避里寺. 改名念佛寺. 寺旁亦有寺. 名讓避. 因村得名. /////三國遺事卷第五 避隱
아주 짧아 보이는 100여자의 기록을 통하여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알아낸다는 것은 무척 힘이 든다. 기록이 너무 적다보니, 자칫하면 발표자께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소설적 상상으로 빠져들 수 있어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경계를 넘어갈 수도 있다. 이러한 발표자의 주장은 나에게 지극히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여졌다.
참고로 ///발표자의 여러 논지 중 하나를 보면 발표자께서는 염불사조의 내용을 분석한 후 아래와 같은 주장을 하셨다.
“아마도 미타를 외치던 염불사가 소상의 형태로나마 관음도량인 민장사로 돌아간 것은 두 신앙의 결합이나 融・複合을 그대로 드러내어주는 대목이다. ..<생략,>.. 그런 측면에서 염불사조의 이야기는 미타와 관음의 두 신앙이 결합하게 되는 배경과 상황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내용은 어쩌면 彌勒에 대신하여 관음과 함께 미타신앙이 확산되어 통일신라 초기의 것으로 봄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자료집 34쪽에서 부분 인용
이상 각설하고,...
아래는 필자가 관심이 있었던 避里村에 대한 부분이다.
염불사조의 기록은 [三國遺事卷第五 避隱]에 기록되어 있다. 避隱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을 피하여 은거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판단을 해보면,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심산유곡 정도에 옮겨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염불사조의 기록에는 염불사가 南山東麓의 避里村에 避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왕경에 같이 있었다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염불사가 避隱한 ‘南山東麓의 避里村’에 필자가 주목하는 이유는 사금갑조에 그와 같은 지역을 의미하는 避村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전 사금갑조의 기록을 분석한 적이있다. 조금 더 살펴본다. 사금갑조의 기록은 우화와 실사가 서출지를 경계로 연결되어 있다. 전반부에서 王에게 추격과 감시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바로 까마귀이며, 이 까마귀가 간 곳이 南山東麓의 避村이다. ‘避’는 ‘피하다, 회피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한자이다. 그러나 王이 보낸 기사(추격자0는 이곳에서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버린다. 홀연히 못 속에서 나타난 노인(밀고자)을 통하여 까마귀가 간 곳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王은 宮으로 돌아와 금갑을 향하여 화살을 발사하니, 그 곳에서 內殿焚修僧과 宮主가 伏誅되었다.
王의 추격과 감시의 대상이 되는 존재인 까마귀는 王에 의하여 주살 당하는 內殿焚修僧과 宮主와 같은 실체가 되어야한다. 그래야 이야기의 전개가 모순이 없이 이어진다. 그러니, 二人伏誅 이후 신라사회에 烏忌之日이라는 풍속을 생기는데, ‘烏忌之日’은 ‘까마귀 제사하는 날’을 말한다.
까마귀 ==> 內殿焚修僧과 宮主 ==> 烏忌之日
그리고 墨胡子는 고유인명이라기 보다는 피부가 검은 인도(胡)의 승려를 뜻하는 표현으로 파악되며, 까마귀로 표현된 內殿焚修僧은 여러 墨胡子 중 한명으로 보인다. 까마귀와 內殿焚修僧(墨胡子)이 동일한 실체로 연결되는 것은 바로 검다는 것이다. 피부가 “새까만 胡(인도)의 스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주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 糯飯으로 한다고 했다.
사금갑의 원문을 다시 살펴보자.
自爾國俗每正月上亥上子上午等日. 忌愼百事. 不敢動作. 以十五日爲烏忌之日. 以糯飯祭之. 至今行之. 俚言怛忉. ,... 이하 생략
위의 기록을 보면 俚言怛忉라는 표현이 보인다. 怛忉에 대하여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나 그들의 연구물들을 보면 ‘정월 대보름’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의 다른 표현이 怛忉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금갑조 문장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아닐까?
俚言怛忉를烏忌之日의 다른 표현이 아니라, 糯飯에 대한 다른 표현은 아닐까?
인도 음식에 달(Dhal)이 라는 것이 있다. 콩을 삶아서 마살라(향신료)를 넣고 국이나 수프 형태로 만든 인도의 전통요리이다. 백과사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 'Dal'이라고도 쓴다. '달'은 산스크리트나 힌디어로 '콩'을 뜻한다. 달에 밥을 말아 먹거나 비벼 먹기도 하고, 인도식 빵인 차파티·푸리·이들리 등을 찍어 먹는다. 달은 콩의 종류와 함께 넣는 재료에 따라 색깔과 모양, 맛이 다르다. //
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특별한 음식을 먹는다. 그 것은 ‘오곡밥’이라하는 것인데. 쌀을 할 때 여러 가지 곡물을 같이 섞어서 만드는 것이다. 필자는 이 오곡밥이 인도 음식인“달(Dhal)”에 그 기원이 있지 않은가 추측하고 있다.
아마 신라 땅으로 온 인도의 여러 스님들은 그 들의 계율에 따라 육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음식문화 중 달(Dhal)이 콩을 기본으로 하는 음식이므로 육식을 하지 않으면서도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선호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그 인도에서 온 검은 피부의 스님이 소지왕에 의하여 죽음을 맞이하고 난 후, 신라사회는 온 나라 안이 부들부들 뜰고 있다. 그러나 스님이 죽은 날을 기억하고, 신라인들은 그 스님이 즐겨 먹던 음식[달(Dhal)]을 먹었는데 그 것이 우리의 풍속 속에 오곡밥의 형태로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아닌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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