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livemiri (2009-11-15 00:24:42, Hit : 0, Vote : 0) 제목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지석과 대륙백제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지석과 대륙백제
武寧王陵에서는 왕과 왕비의 지석이 출토되었다. 그 곳에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것은 아래와 같다.
武寧王陵誌石(王)
<表面>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登冠大墓立志如左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은 나이 62세인 계묘년(서기 523년) 5월(초하루는 병술) 7일(임진)에 崩御하셨다. 을사년(서기 525년) 8월(초하루는 계유) 12일(갑신)에 이르러 대묘에 높이 받들어(登冠?) 편안히 모시고 左와 같이 志를 세웠다.]
武寧王陵妃誌石(王妃)
<표면>
丙午年十一月百濟國王大妃壽終居喪在酉地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志如左
[丙午년(서기 526년) 11월 百濟國 王大妃가 목숨이 다하여 居喪 중에 酉地에 모셨다. 己酉년(서기 529년) 2월(초하루는 계미) 12일(甲午)에 改葬하여 大墓로 옮기고 左와 같이 志를 세웠다.]
<이면>
錢一万文右一件乙巳年八月十二日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以前件錢訟(또는詢)土王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不從律令
[錢一万文의 右一件은 을사년 8월 12일의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의 것이다. 前件의 錢이기 때문에 (다시) 土王, 土伯, 土父母에게 訟事하여, 상하의 여러 관리(上下衆官)는 二千石으로 申地를 買入하여 묘를 만들었다. 고로 매지권(卷)을 작성하니(立), 율령에 따르지 않음을 명백히 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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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보인 지석의 기록에서 오늘 살펴볼 내용은 ‘土王土伯土父母’이라는 기록이다.
土王, 土伯, 土父母 앞에 기록되어 있는 ‘土’는 그 땅의 원주인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아프리카 토인’이라고 할 때 그 土人의 ‘土’와 같은 글자이다.
斯麻王과 그의 왕비가 崩 또는 壽終하였을 때, 錢一万文 또는, 二千石을 요구한 자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 실체를 찾아보자.
아래는 남제서의 기록이다.
// 원문 및 번역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app.main.Main.to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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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歲,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幹那率衆襲擊虜軍,大破之。
이 해에 [北]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註021]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沙法名·賛首流·解禮昆·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北魏]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臣自昔受封,世被朝榮,忝荷節鉞,克攘列辟。往姐瑾等並蒙光除,臣庶鹹泰。去庚午年,獫狁弗悛,舉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宵襲霆擊,匈梨張惶,崩若海蕩。乘奔追斬,僵屍丹野。由是摧其銳氣,鯨暴韜凶。今邦宇謐靜,實名等之略;尋其功勳,宜在褒顯。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木幹那前有軍功,又拔台舫,爲行廣威將軍、面中侯。伏願天恩特湣聽除。」
○ 建武 2년(A.D.495; 百濟 東城王 17) 에 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臣은 封爵을 받은 이래 대대로 朝廷의 영예를 입었고, 더욱이 節符와 斧鉞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앞서 姐瑾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받아 신민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지난 庚午年(서기 490년)에는 獫狁[註022]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註023]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실상 [沙法]名 등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沙法名을 假行征虜將軍 邁羅[註024]王으로, 賛首流를 假行安國將軍 辟中[註025]王으로, 解禮昆을 假行武威將軍 弗中[註026]侯로 삼고, 木干那는 과거에 軍功이 있는 데다 또 城門과 선박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行廣威將軍 面中[註027]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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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 牟大는 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幹那 등이 魏虜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에 대하여 남제에 표문을 올려 그들에게 邁羅王, 辟中王, 弗中侯, 面中侯 등의 작위를 정식으로 받아 준다.
백제왕 牟大는 魏虜와의 전쟁에서 장군을 파견하였다. 파견된 장군의 지휘를 받은 병사들은 당연히 현지에 있었다. 그 현지에 있던 병사들의 실체는 25사 중 “晉書”를 잘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진나라 시절 幽州로 이민을 간 수 많은 마한인들이 백제왕 牟大가 파견한 장군(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幹那)을 중심으로 魏虜와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륙백제라는 허상의 실체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沙, 贊, 解, 木씨 등이 시간이 흘러 백제의 지배계층을 이룰 ‘8성대족’[수서 : 國中大姓有八族,沙氏、燕氏、刀氏、解氏、貞氏、國氏、木氏、苗氏。]으로 발전하는 집단의 일부이다.
이들이 바로 ‘土王’집단임을 이해할 때 백제사의 많은 오해가 해결된다.
그 들의 선조는 누구인가?
이들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자신의 기록을 본의 아니게 남겨 놓았다.
고구려에게 박살나서 위례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도망간(?) 한성백제는 실질적인 종말을 고한다.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고 했다. 위례성에서 성문을 꼭꼭 잠그고 살던 사람들이 이제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도망쳐 나오는 동안 엄청난 두려움에 날마다 악몽을 꿨을 것이다. 이제 城을 버린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에 다시 몸을 던졌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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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금요일 늦은 밤 아내가 일요일 저녁에 올 예정으로, 멀리 어린 시절의 고향친구들과 만나는 여행을 갔습니다. 저는 이처럼 가끔씩 아내 없이 하루를 혼자 보낼 때, 해방감이 들곤 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떠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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