阿兮牟弘과 阿兮牟呼의 소리값 /그리고 □□□□님에게 답변
울주천전리 각석의 원명과 추명에 阿兮牟弘과 阿兮牟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명은 법흥왕 12년(525)에 추명은 그 14년 뒤인 539년에 작성된 것입니다. 14년 뒤의 기록이라 추명을 작성하면서 원명의 기록과 같은 부분은 옮겨 적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래와 보인 바와 같이 원명에 보이는 智와 弘이 추명에는 知와 呼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智와 知는 그 소리값이 같으나 ‘弘과 呼’ 사이에는 소리값의 차이가 있습니다.
원명 眞宍智沙干支妻阿兮牟弘夫人 추명 眞宍知珎干支婦阿兮牟呼夫人
저는 예전 ‘弘과 呼’의 소리값을 ‘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경상도 사람들 사이에 받침이 ‘ㅇ’이나 ‘ㄴ’이 오는 경우가 ‘ㅣ’와 연결될 때의 소리값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말에서 鼻音은 ‘ㅁ,ㅇ,ㄴ’이 있는데 이 셋과는 음가가 전혀 다른 소리가 하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소리값을 나타내는 글자를 저의 글에서 ‘^ㅇ’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阿兮牟弘 또는 阿兮牟呼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은 眞宍智(知)의 부인으로 분명 동일한 사람입니다. 그 동일한 사람의 이름을 표현함에 ‘弘과 呼’로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은 弘자만으로는 표현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 14년 뒤에 다시 적는 글에서 呼를 적으면서 살려놓았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것이 바로 그 당시 천천리 각석에 글을 적었던 사람들의 소리값 중에 현재 우리글에는 없지만 실질적으로 경상도 사람들 중에 발음할 때 소리가 나타나는 ‘^ㅇ’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경상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 후손들은 태어나서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말을 배우면서 서서히 그들의 언어가 고착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발음을 하고 있습니다.
예로 ‘강호동’이라는 이름으로 저의 생각을 표현하였는데, 경상도사람들은 ‘강호동’을 부를 때 인칭접미사 ‘ㅣ’를 첨가하여 ‘강호도^이’라고 발음을 합니다. ‘신봉선’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로 ‘신봉서^이’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인칭접미사 ‘ㅏ’를 첨가할 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강호동아’, 또는 ‘신봉서나’로 발음되어 ‘ㅇ,ㄴ’의 소리값에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이 점은 경상도 사람들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는 ‘순경음 ㅂ’과 비슷한 경우로 생각합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더워서’를 ‘더버서’로 발음하지만 ‘버’의 ‘ㅂ’발음은 ‘바다’의 ‘ㅂ’의 발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조선조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순경음 ㅂ’은 만들었지만 비음 ‘^ㅇ’은 만들지 않아서 한글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阿兮牟弘 또는 阿兮牟呼가 인칭접미사 ‘ㅣ’가 첨가되어 둘 다 똑 같이 ‘아혜모호^이’로 발음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경우로 경상도 사람들이 발음하는 ‘강호도^이’나 ‘신봉서^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한글로 받아 적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민을 많이 할 것입니다. 아마 ‘강호도, 강호동, 강호돈’ 또는 ‘신봉서, 신봉성, 신봉선’으로 적겠지만, 자신이 ‘적었던 글’과 ‘발음이 다른 것’같아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비슷하게 ‘阿兮牟弘과 阿兮牟呼사이에 나타나는 표현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 阿兮牟弘과 阿兮牟呼에 대한 저의 사고를 먼저 언급하였습니다. 阿兮牟弘과 阿兮牟呼에 대하여는 원래 독립된 글을 적을 예정이었기에 윗글로 소벌가리님의 질문에 갈음합니다. 그리고 아래는 소벌가리님의 /동/과 /두/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글을 원질문글의 댓글로 작성할려다가 제가 쓴글과 많은 연관이 있어 이곳에서 답변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먼저 □□□□님이 쓰신 글 阿兮牟弘과 阿兮牟呼의 대응은 참으로 귀한 대응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軍威는 본디 奴同覓縣인데 如豆覓현이라고도 하였습니다. 同의 소릿값이 /동/이 아닌 /도/를 적은 게 아닌가 생각되곤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弘의 한자음이 /홍/이 아닌 /호/를 적었던 것은 아닐까요? 마치 일본 한자음처럼 말입니다.
/////////////// livemiri
삼국사기에서 奴同覓縣 부분의 기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嵩善郡>, 本<一善那{一善郡}>, <眞平主{眞平王}>三十六年, 爲<一善州>, 置軍主. <神文王>七年, 州廢, <景德王>改名, 今<善州>. 令縣三: <孝靈縣>, 本<芼兮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尒同兮縣>, 今未詳; <軍威縣>, 本<奴同覓縣>[一云<如豆覓{如臣覓}>.], <景德王>改名, 今因之.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숭선군은 원래 일선군으로서 진평왕 36년에 일선주라 하고 군주를 두었으나 신문왕 7년에 주가 폐지되었다가, 경덕왕이 일선군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선주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효령현은 원래 모혜현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동혜현은 지금 분명치 않다. 군위현은 원래 노동멱현[여두멱이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 출처 : 진갑곤님의 삼국사기
奴同覓 一云如豆覓에서 ‘奴’와 ‘如’가 대응하는 글자이며 ‘同’과 ‘豆’가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윗 자료를 보면 三國史節要를 통하여 如臣覓도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同’은 ‘臣’와도 대응합니다.
먼저 제가가 ‘노’와 ‘여’의 차이를 보면서 드는 사고는 1. 발음은 많은 차이가 나지만, 글자의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2. 그래서 삼국사기를 집필하면서 저본이 된 사료들 중 혹시 ‘노’라는 글자가 쓰여진 부분이 시간이 많이 지나 종이가 헤지거나 또는 다른 요인 등등으로 인하여 원래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奴’같기도 하고 ‘如’같기도 하여 노字를 우선으로 하고 ‘如’字를 一云으로 남겨놓은 것은 아닌가? 3. 三國史節要에서는 그 글자를 ‘如’로 판단하였구나.
그리고 ‘동’에 대한 저의 추론은 ‘同’은 삼국유사에서 一云 ‘豆’로 그리고 三國史節要에서는 ‘臣’으로 되어 있습니다. ‘同’과 ‘豆’는 소리값이 비슷하지만, ‘同’과 ‘臣’의 소리값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러나 ‘同’과 ‘臣’은 글자가 조금 비슷합니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집필하면서 저본이 된 사료들 중 ‘同’자 부분도 종이가 헤졌거나, 종이가 좀 찢어지고 이물질이 묻었거나. 아니면 판각할 때 획이 좀 이상했다든지, 또 판각한 후 먹이 좀 적게 묻어 글자를 잘 알아볼 수 없었기에 ‘同’, ‘豆’, ‘臣’ 등으로 기록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래 세연님이 올려주신 예전 글에서도 똑 같은 그림화일을 보고도 ‘方은 去인지 古인지’, ‘睿는 處’, ‘省은 有’ 등으로 다르게 파악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저는 ‘同’과 ‘豆’도 비슷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와 ‘여’에 보이는 글자의 유사함이 ‘同’과 ‘豆’에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一云 등의 표현을 만나면 ‘음가가 같거나 비슷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판단하는 것도 있지만, ‘음가가 같거나 비슷한 것과는 상관없는 다른 요인으로 一云을 사용한 경우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더러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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