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글은 風月 또는 風月主를 통하여 지금 세간에 전해지고 있는 화랑세기가 그 옛날 김대문의 화랑세기인가 아닌가 하는 진위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風月이라는 표현이 쓰였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글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적은 글은 // 1.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풍월주과 똑 같은 표현이 [박창화 發 화랑세기]에도 보인다. 2. 그래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비교해보자. 3. 비교를 해보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법흥왕 원년에 풍월주를 설치했다.’라는 기록이 잘못된 기록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風月主란 표현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風流 또는, 風月道’라는 표현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저자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죠.
이야기를 좀 더 추가해 보면,
사실 삼국사기에는 風流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흥왕 37년 기사에 보이는 바와 같이 “或相磨爾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라고 표현해 놓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風流의 사전적 의미와 거의 같습니다. 또 최치원의 표현을 인용하여 이러한 ‘風流’를 공자의 유교, 석가의 불교와 비교하여 ‘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삼국유사에는 風月道라는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風月道라는 표현이 ‘신라인들 당대의 표현인지, 아니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집할 때 사용된 저본에 있던 기록인지, 아니면 일연이 만들어 낸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風月道는 삼국사기의 風流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은 분명합니다.
삼국유사에서 몇 개의 기록을 찾아보죠. ㄱ. 第二南解王 ,..... 或曰麻立干.[立一作袖.]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標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ㄴ. 有興輪寺僧眞慈.[一作貞慈也.]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 ㄷ. 又俚言似如樹.[一作印如樹.]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 ㄹ. [國史. 眞智王大建八年庚申始奉花郎. 恐史傳乃誤.]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
위 기록을 보면 일연은 여러 판본(?)에 보이는 글자의 차이나 서로 다른 서적의 일치하지 않은 기록에 대하여 추가로 주석을 남겨 놓았습니다. 위 주석 중 ㄹ.의 國史를 인용한 것을 보면 그 당시 화랑에 대한 기록이 여럿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 중에 ‘화랑이나 國仙’ 이외에 ‘風月主’란 표현이 등장했다면 일연은 주석으로 남겼을 것입니다. 여러 판본(?)에 보이는 글자의 차이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는데 風月主라는 표현을 일연이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연은 風月主라는 글자를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 일연 당시에는 風月主라는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맥아무개라는 분의 글은 예전 신문기사로 접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 분의 사고 중 일부가 저와 비슷하였기에 참고로 소개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세간에 전해지고 있는 [박창화 發 화랑세기]는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의 기간 동안 활동하였던 신라의 화랑 중 우두머리 화랑 32명의 전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하여 재구성해보니 최초의 國仙은 설원랑이고 그가 진흥왕 37년(서기 576년)에 초대國仙에 임명되고 그를 이어 미시랑이 國仙에 오른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박창화 發 화랑세기]가 진서라고 주장을 할려면, 제가 파악한 국선관련 기록과의 불일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여 의혹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도 적은 글이지만, [박창화 發 화랑세기]에서 어떤 사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여 진서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박창화 發 화랑세기]를 진서라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의문점이 해명되고 납득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박창화 發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소설로 판단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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