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성리비의 이체자 문제 중성리비를 보면 喙나 伐의 일부 획이 보이지않고, 또 蘇의 경우는 글자의 좌우가 바뀌어 잇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의 시각은 “비를 세우는데 관여한 사람들이 한자를 완벽하게 습득하지 못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학에서 한문학을 강의하시는 교수님들이 주축이 되어 중요한 비석을 세우는 경우와 고등학교에서 중간 정도하는 학생들이 재미삼아 한문 비석을 세우는 경우를 비교하면 어떨지???? 아마 전자는 유려하고 격조 높은 문장으로 비가 완성될 것이며, 후자는 획의 틀림도 많고 더러는 우리말어순의 한문문장도 많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저가 중성리비를 바라보는 시각도 위와 같습니다.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使人과 또 비문 말미의 典書 与牟豆, 沙喙 心刀里(?) 등이 비문을 세기고 비석을 세웠을 것입니다. 먼저 언급한 바와 같이 使人의 부명과 관등명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典書를 한 与牟豆에게도 부명과 관등명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奈麻급 이상의 고위 신분자에 비해 학습이나 교육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이러한 신분이 아주 낮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立碑과정에 의하여 ‘잘못된 자획(지금으로 치면 오타)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비슷한 시기의 냉수리비와 비교해 보면 냉수리 비는 典事人인이 沙喙壹夫智奈麻를 포함한 7명인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고 봅니다. 저는 냉수리비, 중성리비 등의 비교를 통하여 이 당시 신라사회는 일상생활에서는 완벽한 한자생활을 하는 지배계층(?)과 교육의 혜택을 적게 받아 문자생활이 서툰 경우를 보여주는 명확한 물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炤知王이 단행한 인사이동과 양서에 기록된 其官名 (0) | 2009.10.14 |
---|---|
냉수리비에 보이는 此七王等과 양서 신라전의 旱支 (0) | 2009.10.14 |
중성리비 문단 구분과 내용파악 (0) | 2009.10.09 |
한국고대사학회에 중성리비 관련 토론문들이 많이 올라와 있네요 (0) | 2009.10.05 |
喙(훼)와 啄(탁)의 소리값 #2 - 양서 신라전의 啄評 (0) | 2009.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