喙(훼)와 啄(탁)의 소리값 #2 - 양서 신라전의 啄評
양서는 629년 당의 姚思廉이 편찬한 梁의 正史이다. 이 양서에는 중국의 정사기록에서 처음으로 신라전이 입전되어 있다.
그 신라전에 신라가 양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普通二年,王募名秦,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이 기록과 대응하는 기록이[三國史記] 신라본기 법흥왕 八年조에 “遺使於梁貢方物”라고 보인다. 그러나 백제본기에는 기록이 없다. 新羅가 최초로 梁에 사신을 파견한 普通 2年(서기 521년)은 法興王 8년에 해당한다.
또, 이 양서 신라전에서 눈여겨 보아야할 기록이 있다.
/////////////////////////////// 其俗呼城曰健牟羅,其邑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 (그 俗에 城을 호칭하여 健牟羅라 이르며, 그 邑이 안에 있는 것[在內]은 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在外]은 邑勒이라 하니, 또한 중국의 말로 郡縣이다. 나라에는 6啄評과 52邑勒이 있다.) ///////////////////////////////
위 글을 보면 健牟羅, 啄評, 邑勒이라는 단어가 들어온다. 이러한 단어들은 분명히 普通 2年(서기 521년)에 신라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통하여 얻어진 정보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 신라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먼저 울진봉평신라비가 있다.
울진봉평신라비는 법흥왕 11년(서기 524년)에 세워진 신라인들의 기록이다. 신라인의 기록(울진봉평신라비)은 1차 사료로써, 그 어떤 2차 자료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울진봉평신라비와 양서 신라전의 자료를 비교함에 우리는 신라인의 기록(울진봉평신라비)을 먼저 존중해야한다. 그래서 양서 신라전의 기록을 울진봉평신라비를 통하여 교정해 보자.
먼저 봉평비에는 법흥왕이 喙部牟即智寐錦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牟即智가 양서에는 王募名秦으로 변형되어 있다. 신라인들이 ‘牟即智’라고 부른 자신들의 국왕이름을 梁서가 募와 이름 秦으로 구분하여 기록한 것은 ‘성과 이름에 대한 오해로 파악한다’는 것이 많은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2번째 봉평비에는 신라왕경에 대응하는 新羅六部와 지방행정조직 중 하나로 보이는 居伐牟羅가 기록되어 있다. ‘봉평비의 居伐牟羅, 居伐牟羅道使 등의 표현에 보이는 牟羅’가 바로 양서에서 城曰健牟羅라 한 牟羅와 글자까지 같다. 또, 양서 신라전은 在內, 在外라는 표현으로 신라왕경과 지방행정조직을 구분하였다. 이어지는 문장이 亦中國之言郡縣也라 한 것으로 보아 啄評과 邑勒을 梁의 관리들은 분명히 행정조직으로 파악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國有六啄評,五十二邑勒이라하여 구체적인 숫자까지 기록되어 있다.
봉평비에 기록된 /新羅六部/와 /⧠⧠牟羅/는 양서 신라전에는 /在內, 六啄評/과 /在外, 五十二邑勒/으로 표현되어 있다. 둘 사이의 대응관계가 명확하다. 그렇다면 邑勒은 무엇인가? 필자는 읍락(邑落)의 신라식(아니면 신라사신의) 발음을 기록한 것에 대한 오류로 파악한다. 그리고, 邑勒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와야 할 단어는 바로 牟羅라고 추정한다.
문장을 살펴보면 먼저 ‘其邑’이라 하여 ‘其’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其’가 가리키는 대상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 것을 찾아보면 바로 健牟羅이다. 健牟羅라는 邑 중에 안에 있는 것은 啄評이요, 밖에 있는 것이 邑勒이라는 것이다.(在內曰啄評,在外曰邑勒)
梁을 방문한 신라사신에게 梁의 관리가 물었다. “너희 나라 임금의 이름이 무엇이뇨?” 신라사신이 대답했다. “예 牟即智라 하외다.” 梁의관리는 혼자 되뇌이며 메모를 했다. ‘아!! 募가 성이고 秦이 이름이구나.(王募名秦)’
“당신네 나라에는 성(城)이 많은가?” “왕경 밖에는 큰(健) 모라(牟羅)가 많아요. 52개나 된다우!! 당신들이 말하는 邑落과 같은 거라우. 그리고 왕경 안에는 6부가 있어요. 喙부 沙喙부,....”
다음에 계속,..... ver 0.000.9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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