炤知王이 단행한 인사이동과 양서에 기록된 其官名
“干支(旱支) = 왕과 같은 존재”라는 인식은 냉수리비의 ‘此七王等’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此七王等’을 ‘7명의 왕들’로 번역함으로써 干支는 왕과 동급의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간단한 몇 개의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엉터리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智證왕의 바로 앞은 炤知{照知}왕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炤知{照知}왕 시기의 기록 몇 개를 골라보자.
炤知{照知} 元年, 大赦, 賜百官爵一級 六年, 春正月, 以<烏含>爲伊伐湌. 八年, 春正月, 拜伊湌<實竹>爲將軍. (생략) 二月, 以<乃宿>爲伊伐湌, 以參國政.
위의 기록은 炤知왕이 신하들에게 인사이동을 한 기록이다. 기록을 보면, 百官, 伊伐湌, 伊湌 등의 표현이 보인다. 이 伊伐湌, 伊湌 등이 신라금석문에 보이는 干支를 말하는 것이다. 왕에 의하여 임명되는 존재가 왕과 동급의 존재일 수는 없다. 그리고, ‘왕이 신하를 임명할 때’ 또는 ‘국가 내외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등등에는 여러 신하들과 충분한 共論을 하였을 것이다. 현명한 왕일수록 신하들의 많은 이견을 수렴하고자 하였을 것이며, 사안이 중대할수록 많은 신하들이 참가하였을 것이다. 신하들과 충분한 共論을 한다고 “왕과 干支(신하)의 권력의 차가 그리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은 코미디일 수 있다.
‘냉수리비를 통하여 왕과 干支가 동급이라고 주장하거나, 干支를 왕으로 이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위에 보여준 기록처럼 그는 삼국사기의 많은 부분이 위작임을 증명해야한다. 삼국사기에는 干支를 왕이 인명하는 존재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기록인 [양서 신라전]을 다시 살펴보자
“其官名, 有子賁旱支, 齊旱支, 謁旱支, 壹告支, 奇貝旱支”
官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서에는 분명히 旱支를 왕명이 아니고, 官名(관등명)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만약 이 때 양으로 간 신라의 사신(旱支)들이 王의 신분이었다면 그 들은 양의 관리에게 자신이 王이라고 알렸을 것이다. 그리고, 양서에는 “其王號, 有子賁旱支, 齊旱支, 謁旱支, 壹告支, 奇貝旱支” 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