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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miri(2010-07-15 16:25:15, Hit : 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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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가야사
삼국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가야사



어제는 강우석감독의 “이끼”가 개봉되었지요. 예전 윤태호작가의 원작 만화를 인터넷상에서 몇 번 본적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구요. 영화가 개봉된다길래 몇 일 전에는 원작 만화도 다시 정독을 하였어요. 그리고 어제 저녁 아내와 같이 상영관을 찾았죠. 영화를 마치고 나오는 아내의 말이 ‘2시간 40분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고 하더군요. 상영관을 나와 맥주도 한잔하고,... 매일 이럴순 없지만, 얼마 전 “방자전”을 같이 본 이후로 다시 즐겁고 재미있게 보낸 하루였어요.


집에서 상영관을 가는 길은 도보로는 좀 먼 거리고, 차를 이용하기에는 어정쩡한 길이에요. 가다보면 편의점이 하나 있는데, 아리따운 아가씨가 주인인지, 나이드신 할아버지가 주인인지도 잘 모르고, 집근처에서 누군가가 편의점의 위치를 물어보면 한 번 씩은 생각이 나지 않아요. 건망증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항상 머릿속에 편의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아서인 모양이에요. 나도 타지로 가면 길이나 건물의 위치를 물어볼 때가 있는데,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시는 분도 있지만 한번 씩 잘 모른다는 현지인(?)도 만나요. 그런데 목적한 곳을 찾았는데, 그 곳이 내가 조금 전에 물어본 위치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일 때도 종종 있어요.


역사 기록에서 길을 물어볼 때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위지 왜인전을 보면 대방관리가 동경이며, 여러 보배로운 물건들을 짊어지고 비미호를 찾아가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도 물어물어 찾아갔을 터이고, 현지 지리사정이 밝지 않은 원주민에게 물어 헛걸음도 많이 했을 것이라 상상해 보았어요.




서론이 길었네요.


삼국시대에 대하여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가야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가야사에 대한 사고가 언제부터 있어왔는지를 생각해 보았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선조들의 역사서 중 가장 빠른 정사는 ‘삼국사기’죠. 삼국사기는 말 그대로 세 나라의 역사인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어요. 세 나라를 모두 ‘본기’로 연대기를 작성해 두었어요. 그런데 가야의 역사는 ‘본기’로 작성되어 있지 않아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매, 진삼국사표에서 ‘此海東三國’이라는 표현을 해요. 가야의 역사까지 기록하였다면 海東三國이라는 표현은 海東4國으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책의 제목도 삼국사기가 아니라 사국사기일테고,...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가져볼만한 게 있어요.
왜 김부식(삼국사기의 집필자들)은 삼국의 역사만을 정사로 기록하였을까?

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해요.
그 당시 고려인들이 인식한 자신들의 선조의 역사는 신라, 고구려, 백제라는 것이에요. 요즘이야 가야사가 우리의 역사라는 인식이 팽배하지만, 그 당시 고구려인들은 가야사를 자신들 선조의 역사가 아니었다고 판단을 했다는 것이죠. 부여사나 발해사 또한 마찬가지죠. 정사에 역사 기록을 남기지 않았어요. 그 전에는 우리의 선조들이 스스로 가야사나 부여사, 발해사를 작성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판단을 할 수 없지만, 12c에 고려인들이 정사를 새롭게 기록하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만 우리의 정사로 기록했다는 것은 그 것이 그 당시의 역사관이 그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다만 삼국사기는 지리지에 가야의 불완전한 왕력만을 남깁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사찬으로 편찬된 가락국기가 있어 가야의 왕력과 역사를 남기지만, 고려시대의 정사기록 이디에도 가야의 본기는 찾아 볼 수 없어요. 설령 가양의 본기가 있었다면 그 이후의 여러 문헌에 조금의 片鱗이라도 남길텐데,..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가야본기’라는 말은 접한 적이 없네요.


삼국사기를 조금 더 살펴보면 ‘古記’라는 옛 문헌도 언급합니다. ‘고기는 문자가 거칠고 拙하며 事蹟이 누락되고 망실되었다.’고,..

삼국사기에 인용된 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이전에 기록되었겠죠. 언제쯤에 편찬되었는지 확인할려면, 삼국사기 열전 중 견훤전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견훤전이 ‘고기’를 인용하여 열전을 작성한 것으로 보아 아무리 빨리 잡아도 ‘고기’의 상한은 고려초를 넘어가지 못하죠.


그런데 이 고기의 기록에는 가야의 본기가 있었을까? 저의 생각은 ‘No’예요. 아마 ‘고기’의 기록에도 ‘가야본기’는 없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연은 그의 저서인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의 ‘제왕연대력’을 보았다고 했어요. 아마 그 곳에 가락국기와 다른 가야의 역사기록 있었다면, 그가 가락국기를 인용하며(?) 開皇曆, 開皇錄 등의 기록을 통하여 기년을 비교한 것처럼 자신의 책에다가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판단해요.

또 다른 가능성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과 가락국기의 왕력이 일치하였기에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하여튼 고려시대의 정사기록에는 ‘가야사가 본기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가야사는 어디에 기록되어 있나? 필자의 주장이 바로 일본서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서기가 가야사를 자신의 역사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야사를 기년을 뒤틀어서 일본서기에 기록해 두었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가락국기도 일본서기에 기록된 가야의 왕력이 없는 것이예요. 수로왕과 거등왕은 부자가 아니죠. 거등왕은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수로왕의 가야는 멸망하고, 이후 가야를 재건국하는 초대왕이죠. 가락국기 또한 한반도에서 재건국한 사람들의 왕력만을 남겨놓죠.



자!!!! 누가 남의 나라 역사에 주어를 바꾸어 넣었을까요?



필자는 가야사를 일본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 고려인들의 역사인식을 필자 나름으로 살펴본 것입니다. 필자는 가야사를 한 ․ 일 양국이 공통으로 소유해야하는 역사의 공통부분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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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을 소설로 이해하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막연히 소설이라고 말하지 말고 소설이라 생각되는 부분에 대하여 질문을 하시면, 시간을 내어 성심성의껏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글이 소설이라고 생각이 들면 스스로 읽지 않으면 됩니다.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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