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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miri(2010-08-23 23:15:02, Hit : 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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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倭國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倭國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3세기 말부터 4세기 말까지의 倭國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삼국사기 <儒禮>尼師今기

○六年(서기 289년), 夏五月, 聞<倭>兵至, 理舟楫, 繕甲兵.
○九年(서기 292년), 夏六月, <倭>兵攻陷<沙道城>, 命一吉湌<大谷>, 領兵救完之.
○十一年(서기 294년)夏, <倭>兵來攻<長峰城>, 不克. 秋七月, <多沙郡>進嘉禾.
○十二年(서기 295년)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 舒弗邯<弘權>對曰: “吾人不習水戰, 冒{ }󰄲險遠征, 恐有不測之危. 況<百濟>多詐, 常有呑噬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삼국사기 <基臨>尼師今기

○三年(서기 300년), 春正月, 與<倭>國交聘.



삼국사기 <訖解>尼師今기

○三年(서기 312년), 春三月, <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阿湌<急利>女送之.
○三十五年(서기 344년), 春二月, <倭>國遣使請婚, 辭以女旣出嫁.
○三十六年(서기 345년), 二月, <倭>王移書絶交.
○三十七年(서기 346년),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湌<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 走之.


삼국사기 <奈勿>尼師今기

○九年(서기 364년),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三十八年(서기 393년),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3세기말 신라의 <儒禮>尼師今기에 기록되어 있는 倭國관련 기록을 보면 倭는 바다 건너에 있습니다. 그 왜가 신라와 沙道城, 長峰城 등에서 전투를 합니다. 그 후 신라는 수세적 입장에서 유례25(서기 295)년 백제와 연합하여 왜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지만 단상토론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다 기림이사금기에 왜국과의 交聘기록이 보이고, 급기야 흘해이사금기에 보면 결혼동맹 비슷한 것을 합니다.

얼마 전까지 서로 전쟁을 하던 나라들의 사이가 대단히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화해 무드도 잠깐,..... 신라가 1차 왜국의 청혼을 수락하였지만, 2차 청혼은 거절(서기 344년)함으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냉랭해지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 다음 해에 왜국으로부터 절교한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10여년 후 왜국은 다시 신라(내물이사금 9년, 서기 364년)를 공격합니다.


위 신라본기의 기록에 나오는 왜국은 일본열도에 있는 것에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한 때 김성호박사가 그의 책에서 이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왜를 “임나”라고 주장하여 그 추종자가 몇 명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신라본기의 왜는 분명 일본열도에 있는 존재입니다.



자!! 이번에는 왜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일본서기를 펼쳐볼까요.
서기 289년부터 서기 393년까지를 일본서기에서 찾아보면, 응신천황20년부터 仁德天皇 81년까지입니다. 신라본기와 일본서기가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전혀 다른 내용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서기의 기년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설이 말하는 기년으로 다시 찾아볼까요,..

통설에서 이주갑을 인하하여 일본서기를 들여다보는데,.. 그 방법은 신공을 배꼽부위에서 싹뚝 자릅니다. 사실 배꼽부위에서 싹뚝 자르면 사람은 죽어버리죠. 무슨 말인가 하면 일본서기에 정당하지 않은 변경 해석을 한다는 것이죠. 그럼 이제 역사의 연구가 아니라 소설적 구상이 되는 거죠. 그래도 한 번 해보죠.

신공섭정 40년과 43년에 魏志를 인용한 기록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 기록까지는 비미호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신공섭정40년은 서기 240년,.. 그리고 통설은 이 이후 120년의 공백이 있다고 주장을 하죠. 그리고, 그 다음 신공46년은 일본서기 기년으로 서기 246년이지만 통설은 이주갑 인하를 하여 366년으로 이해하죠. 그리고 응신천황 원년은 서기 270년이고 이주갑 인하를 하면 서기 390년,....

이주갑 인하한 일본서기의 기록과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을 비교해 볼까요. 이것도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죠. 일본서기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도리어 백제와 연합하여 왜국을 칠 궁리를 하잖아요.



이번에는 필자가 복원한 기년으로 살펴볼까요. 필자가 복원한 기년을 다시 한번 적습니다.
...., 孝安원년 서기 299년, 孝靈원년 서기 311년, 孝元원년 서기 327년, 開化원년 서기 354년, 崇神원년 서기 354년, 수인원년 서기 362년, 경행원년 서기 371년, 성무원년 서기 371년, 중애원년 서기 372년, 神功원년 서기 381년, 應神원년 서기 390년 ,....

이 기년으로 비교해도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은 전혀 다른 사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일본서기가 기록한 사건과 삼국사기 신라본기가 전하는 사건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은 신라가 일본열도에 있던 倭人들과 교섭한 기록을 전하는 것이고, 일본서기의 기록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貴國(=태왕비의 임나가라)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일본천황들의 동선을 따라서 적은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일본서기와 조금 다릅니다. 신라본기는 경주땅에서 왕국을 이룬 나라의 역사를 적은 책입니다. 우리가 보통 한국사라고 할 때 대한민국만의 역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반도에서 존속했던 고려도 조선도 다 우리의 역사이잖아요.

신라사가 바로 그런 거에요. 처음 박씨가 왕을 하고, 그 다음은 석씨, 마지막으로 김씨가 신라의 주인이 되죠. 이들은 고려와 조선의 관계와 비슷한 거죠. 그러니 신라역사에서 김씨의 시조는 박씨 또는 석씨왕들에게서는 절대 찾을 수가 없어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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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오늘이 처서인데 아직 날이 참 덥죠. 다들 건강 잘 챙기시길,.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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