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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 서석님의 질문에 답변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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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과 後, 원인과 결과를 바꾸면 어찌 합니까? 왜인들이 신라국경에 가득차 성과 해자를 파괴하기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해 고구려군이 남정을 하고 임나가라가 전란에 들어갑니다. 신라국경으로 피해온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전란을 피해 왔단 말입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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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갑인상론을 적용하면 응신 14년은 403년입니다. 광개토왕 남정이후의 일일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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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님이 (2009-01-08 09:37:29)에 쓰신 글 先과 後, 원인과 결과를 바꾸면 어찌 합니까? 왜인들이 신라국경에 가득차 성과 해자를 파괴하기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해 고구려군이 남정을 하고 임나가라가 전란에 들어갑니다. 신라국경으로 피해온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전란을 피해 왔단 말입니까? 서석님이 (2009-01-08 09:45:20)에 쓰신 글 2주갑인상론을 적용하면 응신 14년은 403년입니다. 광개토왕 남정이후의 일일 겁니다. /////////////// livemiri 제가 이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2개의 기록(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비문)을 보여드렸는데 사건의 선후를 파악하는 것이 저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시작은 영락6년보다도 이전입니다. 삼국사기를 읽어 보셨으리라 알고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비문을 보면 [백잔(백제)과 임나가야(비문의 倭)의 연합]과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영락6년에 이루어집니다. 백제가 박살이 납니다. 백제가 박살났다는 소식은 임나가라에도 전해지고 나라 전체에 전쟁의 공포가 엄습합니다. 전쟁이 나면 당연히 피난민들이 생기기 마련이죠. 피난민은 백제에서만 생긴 것이 아니고, 동맹국임나가라에서도 발생했을 것입니다. 비문에는 △人滿其國境 潰破城池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피난민들은 상대적으로 전쟁의 위험이 작은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 곳이 바로 신라와 임나가라의 국경을 통하여 일본열도로 가는 것입니다. 1차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제 2차전을 준비해야지요. 고구려는 영락6년 백제를 박살낸 여세를 몰아, 영락10년 임나가라를 공격합니다. 고구려가 임나가라를 공격하기 전의 상황을 보면 백제와 임나가라(비문의 왜)가 화통을 하고, 고구려와 新羅 또한 전쟁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고구려의 步騎五萬이 임나가라의 심장부로 남정하기 위한 계책을 신라와 협의하였을 것입니다. 5만이나 되는 대군을 백제나 임나가라의 눈에 띄지 않고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작전은 성공하였고,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한 임나가라는 城卽歸服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도망을 갑니다. 그게 바로 제가 주장하는 일본열도의 倭국(응신조)입니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조에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떠나가는 망명인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제가 인용한 일본서기의 기록입니다. ☆『日本書紀』卷十應神天皇十四年 ◆是歲。弓月君自百濟來歸。因以奏之曰。臣領己國之人夫百卄縣而歸化。然因新羅人之拒。皆留加羅國爰遣葛城襲津彦。而召弓月之人夫於加羅。然經三年而襲津彦不來焉。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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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고맙습니다. 김 상님의 삼한백제설에서 본 내용과 유사합니다. 불합리한 면을 한 둘 더 지적하겠습니다.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갈 사람들이 국경에 가득찼다고 가정하더라도 신라가 피난민들을 보고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또 피란민들이 일본에 가서 통일왕국을 건설한다는 가정은 그 시기 일본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지 왜전의 내용도 부정하는 겁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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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드리겠습니다. 서석님 曰 답변 고맙습니다. 김 상님의 삼한백제설에서 본 내용과 유사합니다. livemiri 曰 어디가 비슷한지,..?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차라리 저의 주장은 김성호박사의 “비류백제”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래에 영락 6년조의 분석 글을 올렸는데, 일본열도의 왜(응신조)에 대한 최초의 치밀한 분석은 김성호박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찾아낸 실체를 잘못 비정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바로 비류백제인데, 문법적 한계를 뛰어 넘지 않은 엉터리 허구의 나라죠. 저는 그 실체가 임나가라(즉 비문의 왜)라고 주장하는 것이고요. 廣開土大王碑文 永樂 6年條 서석님 曰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갈 사람들이 국경에 가득찼다고 가정하더라도 신라가 피난민들을 보고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livemiri 曰 영락 9년조의 문맥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면, 서석님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언급하였듯이 “임나가라를 공격하기 전의 상황을 보면 백제와 임나가라(비문의 왜)가 화통을 하고, 고구려와 新羅 또한 전쟁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는 모습이 포착됩니다.” [백잔(백제)과 임나가야(비문의 倭)의 연합]과 [고구려와 신라]가 2차전을 하기 위하여 사전탐색 및 정보수입, 작전계획 수립 등의 과정을 전쟁이 끝난 후 완곡하게 기록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서석님 曰 또 피란민들이 일본에 가서 통일왕국을 건설한다는 가정은 그 시기 일본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지 왜전의 내용도 부정하는 겁니까? livemiri 曰 중국의 정사 기록을 보면 삼국지의 기록에 비미호가 보이고, 그 이후의 일본 열도의 왜에 대한 기록이 전무합니다. 그리고 송서에 왜5왕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일본서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찬자들은 비미호와 응신을 母子로 연결하여 기년을 조작해 놓았습니다. 결국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기록을 통하여는 그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자료를 잘 찾아서 이해하는 길 밖에,.. 그리고, 제 글 어디에 언제 삼국지 동이전 왜인전의 기록을 부정하였습니까? 예전 포상팔국전투에서 패배한 비미호가 일본열도로 도망을 간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livemiri 서석님이 (2009-01-08 14:06:23)에 쓰신 글 답변 고맙습니다. 김 상님의 삼한백제설에서 본 내용과 유사합니다. 불합리한 면을 한 둘 더 지적하겠습니다.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갈 사람들이 국경에 가득찼다고 가정하더라도 신라가 피난민들을 보고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한다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또 피란민들이 일본에 가서 통일왕국을 건설한다는 가정은 그 시기 일본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지 왜전의 내용도 부정하는 겁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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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왜전을 부정하느냐고 한 것은 3세기대 왜의 상황이 그러할진대 5세기 한반도 피란민들이 왜인들을 지배할 정도로 왜의 상황이 호락호락하냐 하는 겁니다. 삼국지 왜전의 일본은 통합의 움직임이 활발하고 통합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비미호는 신공이고. 일본열도의 4세기는 공백이다 이거지요. 4세기대 기내지역의 대형고분(전방후원분)들은 뭡니까? 일본서기 찬자들이 연대를 비정하면서 비미호와 신공을 같이 볼 수는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접한 바 있고.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까지 신공을 가공인물로 보거나 비미호로 볼 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비미호와 신공이 여자라는 것 외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아니면 신공기와 그 이전 기록을 모두 소설로 치부하는 겁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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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드립니다. 서석님 曰 삼국지 왜전을 부정하느냐고 한 것은 3세기대 왜의 상황이 그러할진대 5세기 한반도 피란민들이 왜인들을 지배할 정도로 왜의 상황이 호락호락하냐 하는 겁니다. livemiri 曰 죄송한 이야기지만 님이 3세기 때의 倭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리고 님이 언급한 倭의 상황이 그러하다는 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파악하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면 포상팔국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신의 아들을 신라에 質로 보내고 일본으로 도망간 여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 겨우 계집 종으로 구성된 많은 무사의 보호를 받으며, 魏에 倭왕의 작위를 구걸하는 초라한 여인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조금의 카리스마가 있었는지 그녀의 생전에는 倭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지만, 그녀의 死後에는 왜라는 국가마저 사라져버리는 것 같습니다. 구석구석에 힘센 놈들이 왕질을 하는 상태가 되버린 것 같습니다. 서석님 曰 삼국지 왜전의 일본은 통합의 움직임이 활발하고 통합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비미호는 신공이고. 일본열도의 4세기는 공백이다 이거지요. 4세기대 기내지역의 대형고분(전방후원분)들은 뭡니까? livemiri 曰 저 생각은 그 반대입니다. 비미호에 의해 만들어진 통합은 비미호 이후 모두 해체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래서 “일본서기 작성자들은 그 빈 공백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많이 고민을 하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역사 기록에 없다고 사람들이 살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그 당시 왜인들도 일본열도 이 곳 저 곳에 흔적을 남겨놓았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을 보면, 魏에서 景初년간에 비미호에게 銅鏡百枚를 하사하는데, 그게 일본열도 이 곳 저 곳에서 흩어져 발견된다고 합니다. 저는 그 것을 무덤 속에 가져간 사람들이나 그들의 선조가 더러 조그마한 영역을 가지고 왕질을 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배한 자들이 일본열도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합니다. 망명정부가 안정이 되자 그 들도 주의의 땅들을 정복해 갑니다. 먼저 제가 인용한 송서의 기록입니다. 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 서석님 曰 일본서기 찬자들이 연대를 비정하면서 비미호와 신공을 같이 볼 수는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접한 바 있고.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까지 신공을 가공인물로 보거나 비미호로 볼 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비미호와 신공이 여자라는 것 외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아니면 신공기와 그 이전 기록을 모두 소설로 치부하는 겁니까? livemiri 曰 무엇을 질문하셨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서기 신공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서기 작성자들의 의도를 이해해야합니다. 그리고 작성자들이 의도를 걷어낸다면 그 당시 역사의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아직은 저의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어 있지 않아 더 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livemiri 서석 (2009-01-08 16:33:26) 삼국지 왜전을 부정하느냐고 한 것은 3세기대 왜의 상황이 그러할진대 5세기 한반도 피란민들이 왜인들을 지배할 정도로 왜의 상황이 호락호락하냐 하는 겁니다. 삼국지 왜전의 일본은 통합의 움직임이 활발하고 통합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비미호는 신공이고. 일본열도의 4세기는 공백이다 이거지요. 4세기대 기내지역의 대형고분(전방후원분)들은 뭡니까? 일본서기 찬자들이 연대를 비정하면서 비미호와 신공을 같이 볼 수는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접한 바 있고.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까지 신공을 가공인물로 보거나 비미호로 볼 수는 없는것 아닙니까? 비미호와 신공이 여자라는 것 외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아니면 신공기와 그 이전 기록을 모두 소설로 치부하는 겁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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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 보니 ㅋㅋ 이런 말도 안되는 ㅋ 수정합니다. 문법적 한계를 뛰어 넘지 않은 엉터리 허구의 나라죠. ==> 문법적 한계를 뛰어 넘은 엉터리 허구의 나라죠. (문법에 어긋난 해석을 통하여 엉터리의 허구의 나라를 만들었다.라는 의미로 쓴 글인데, 제가 엉터리로 표현했습니다. 수정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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