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miri(2003-12-11 15:39:55, Hit : 168, Vote : 3)
신라왕 波沙寐錦과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

일본서기 신공기는 중애 9년의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신라를 정벌하는 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미에 一云으로 시작하는 분주가 2개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을 한번 보도록 하지요.

앞 부분 생략 /////[ ]안이 주석 부분입니다.

이에 신라왕 波沙寐錦은 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金 銀 彩色 綾 羅  絹을 배 80척에 싣고 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調를 日本國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高麗와 百濟의 두 나라 국왕이 신라가 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軍勢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軍營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內官家屯倉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12월 戊戌 초하루 辛亥日 譽田天皇을 筑紫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낳은 곳을 宇 라고 불렀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足仲彦天皇이 筑紫 강일궁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이 沙 縣主의 祖인 內避高國避高松屋種에게 신탁하여 천황에게 "천황이 만약 보배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실제로 주리라"고 깨우쳐 주었다. 다시 말하기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황후에게 바쳐라"고 하였다. 곧 신의 말을 따라 황후가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주기를 "지금 천황이 바라고 있는 나라는 비유하면 사슴의 뿔과 같아서 실속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 천황이 타고 있는 배와 穴戶直踐立이 바친 水田, 즉 大田이란 것을 폐백으로 하여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내면 미녀의 눈썹과 같은 金 銀이 많은 눈부신 나라를 천황에게 주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황이 신에게 "비록 신이라고 하지만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어디에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또 내가 탄 배를 신에게 바치면 나는 어느 배를 타야하는가, 그러나 어떤 신인지도 모르니 그 이름을 알고 싶다"고대답 하였다. 이 때 신이 그 이름을 일컫기를 "表筒雄, 中筒雄, 底筒雄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 신의 이름을 일컫고 또한 거듭하여 "나의 이름은 向 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천황이 황후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婦人이다. 어찌 速狹騰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신이 천황에게 "왕 그대가 이같이 믿지 않으니 반드시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지금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얻게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천황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그 뒤 황후가 신의 가르침을 따라 제사지냈다. 즉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이 때 신이 (황후에게) 머물며 인도하였으므로 배를 따라 파도가 일어 멀리 신라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이 나와서 맞이하여 무릎을 꿇고 왕의 배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臣은 지금 이후로 일본국에 있는 신의 아들에게 內官家가 되어 조공을 끊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또 일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軍船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 제가 이 사이트에 소개한 일본서기 번역본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본문과 비교할 대상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신라왕 波沙寐錦이라고 언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분주에는 신라왕 宇流助富利智干라고 한 것입니다. 波沙寐錦과 宇流助富利智干이 동일인인가? 아닌가?앞으로 일본서기를 이해 하는데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신공기 62년조를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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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襲津彦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
[{百濟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壬午年에 신라가 貴國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沙至比 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沙至比 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加羅國을 쳤다. 가라국왕 己本旱岐와 아들 百久至 阿首至 國沙利 伊羅麻酒 爾汶至 등이 그 人民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旣殿至가 大倭로 가서 "천황이 沙至比 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流離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木羅斤資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加羅에 모여 그 社稷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沙至比 가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와 스스로 숨어 있었다. 그 누이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比 가 몰래 使人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릴지 어떨지를 물어 보았다. 누이는 꿈에 가탁하여 "오늘 밤 꿈에 沙至比 를 보았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比 가 어찌 감히 오느냐"라고 하였다. 누이가 천황의 말을 전하였더니 比 는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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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도 신라를 토벌하는 襲津彦 이 백제기를 인용한 분주에는 沙至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만 더 볼까요.

垂仁天皇조의 기록입니다.

2년이 해에 任那人 蘇那曷叱知가 자기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先皇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蘇那曷叱知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一說은 다음과 같다. 御間城天皇(崇神天皇) 때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한 척의 배에 타고 越國  飯浦로 그곳을 角鹿이라 이름하였다.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意富加羅 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都怒我阿羅斯等, 또 다른 이름은 于斯岐阿利叱智干岐이다. 日本國에 훌륭한 임금이 있다고 전해 들었으므로 귀화하려 합니다. 穴門에 도착했을 때, 그 나라에 伊都都比古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는데 臣에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시 두 왕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사람됨을 자세히 보니 기필코 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곧 다시 그곳을 물러났으나 길을 몰라 섬과 포구를 오랫동안 맴돌다가 北海로부터 돌아 出雲國을 거쳐 이 곳에 왔습니다"고 말하였다. 그 때 천황의 죽음을 만나 (이곳에) 머물러 活目天皇(垂仁天皇)에게 벼슬하여 3년에 이르렀다. ///////////이하 생략]

본문의 蘇那曷叱知가 都怒我阿羅斯等 또는 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신공기의 본문과 분주 사이에는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만, 인명표기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본서기 신공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왜인전을 비교해 보면 인명표기에 조금의 차이가 발견됩니다. 그러나 두 기록 사이의 차이와는 다르게 앞서 예를 든 일본서기 垂仁, 신공기의 본문과 분주 사이에는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만, 인명표기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본서기가 말해줄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감사합니다.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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