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을 표절해서 지멋대로 사용한 ‘☐☐’



더러는 방송에서 필요하다고 하여 인터뷰를 해주었다가 ‘인터뷰한 내용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편집되어 방송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깜짝 놀랐다.’가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짜집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근데 기분이 ㅈ같다.
그 감정을 간단히 적어본다.


////////// 붉은 글로 표시된 부분은 무단으로 표절된 필자의 글
///////////////// 무단표절 된 곳에서 인용시작

다음은 livemiri님의 글입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국편에 있는 [삼국지 위 동이전]에 보면 그대로 옮깁니다.
魏略曰: 其子 及[校勘 125] 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校勘 125]「宋本」에는 ‘友’로 되어 있다.

宋本에는 其子友親留在國者 라고 되어 있는 것을 지적한 내용입니다.

아래 글은 宋本에 있는 其子友親留在國者를 통하여 淸州韓氏 족보를 들여다 본 글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용글:출처 : http://blog.paran.com/rootsfind/29855100
그런데 우리 나라에 소개된 판본은 ‘급(及)’자의 획이 가운데가 떨어져 ‘우(友)’자로 읽힌 것이다. 그러면 해석이 ‘其子及親(준왕의 자손과 친족들)’에서 ‘其子友親(준왕의 아들 우친)’으로 바뀌어 준왕의 아들인 우친(友親)이란 고유명사가 된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의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비조(鼻祖)를 기자(箕子)로 하고 상계(上系)는 우친(友親)과 항렬이 같은 우량(友諒)이 되고,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우성(友誠)이 그 시조가 되고,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는 우평(友評 또는 友平)을 그 시작으로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이번엔 후한서를 볼까요.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처음 朝鮮王 準은 衛滿에게 깨뜨려진 바가 되어, 이에 그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이끌고 走入海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自立하여 韓王이 되었다. 準이 後에 絶滅하자, 馬韓人이 다시 自立하여 辰王이 되었다.]

***준왕은 장도에서 위만에게 밀려 수천의 백성들을 대리고 바다로 도주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는 기록입니다.그는 선인왕검께서 건국한 고조선의 평양에서 밀려나 장산군도의 마안도(마한도)에 들려 임시 수도를 세웠다가 그곳에서 서거하자 후손들이 대동강 평양으로 상륙하여 삼한을 통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 무단표절 된 곳에서 인용 끝


무단표절된 곳에서는 이어져 있어, 필자가 /////////////////으로 구분했다. 위,아래의 2개 글 중에 위의 글은 필자가 이 역사21홈피에서 소벌가리님의 “청주한씨 족보: 준왕의 성씨와 한씨”에 댓글로 적은 글이며, 아래의 다른 하나는 필자의 “준왕의 남천과 冒姓韓氏”이라는 부분에서 후한서를 언급한 부분의 글이다.



먼저의 글은 기자의 후손을 표방하는 淸州韓氏의 족보에 있는 글인데, 후대에 淸州韓氏가 족보를 만들면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其子及親(준왕의 자손과 친족들)’을 판독에 문제가 있는 宋本의 ‘其子友親(준왕의 아들 우친)’으로 이해하여, 友諒, 友誠, 友評(또는 友平)을 시조(?)로 하는 淸州韓氏, 幸州奇氏, 太原鮮于氏가 만들어졌다는 취지의 글이다.



그리고, 앞의 소벌가리님의 댓글에는 인용을 하지 않았지만, 이 점을 崇仁殿碑文을 통하여 좀 더 살펴보면,...

///인용
우리 전하(殿下)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지 3년 째인 만력(萬曆) 신해년(광해군 3, 1611년)에 평안도(平安道)의 사인(士人) 조삼성(曹三省)⋅양덕록(楊德祿)⋅정민(鄭旻) 등이 잇따라 소(疏)를 올려 이르기를, “역사(歷史)에서 이르기를, ‘기자의 후손은 41대를 전하여 기준(箕準)에 이르렀는데, 기준은 위만(衛滿)에 의해 축출당했다. 마한(馬韓)의 말엽에 그의 잔손(孱孫)이 세 사람 있었으니, 친(親)이 그 하나인데 그의 후손은 한(韓) 씨가 되었고, 평(平)이 그 하나인데 기(奇) 씨가 되었으며, 양(諒)이 그 하나인데 용강(龍岡)의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서 선우(鮮于)의 세계(世系)로 전해졌다.’ 하였습니다. 또 『운서(韻書)』에서 이르기를, ‘선우(鮮于)의 자손(子孫)에 관한 일이다. 주(周) 나라에서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封)했는데, 그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땅을 채읍(采邑)으로 받았으며, 그것으로 인해 선우(鮮于)를 성으로 삼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목(綱目)』에서 이르기를, ‘기자가 조선(朝鮮)에 봉해졌는데, 그의 자손이 우(于) 땅을 식읍으로 받았으므로 그로 인해 선우(鮮于)를 성으로 삼았다.’ 하였으며, 조맹부(趙孟頫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詩)에서 읊기를 ‘기자의 자손은 덥석부리 노인이 많도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선우(鮮于) 씨가 기자의 후손임은 이미 분명히 드러나서 상당히 뚜렷하지 않겠습니까. 홍무(洪武) 연간에 선우경(鮮于景)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중령별장(中領別將)을 지냈습니다. 그의 7대손(代孫) 식(寔)이 태천(泰川)에서 옮겨와 숭인전 옆에서 살고 있으니, 지금 10년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선우식(鮮于寔)으로 하여금 기자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殿下嗣服之三年萬曆辛亥本道士人曹三省楊德祿鄭旻等相繼抗䟽言史稱箕子之後傳四十一而至準爲衞滿所遂馬韓末有孱孫三人曰親其後爲韓氏曰平爲奇氏曰諒入龍岡鳥石山以傳鮮于世系韻書曰鮮于子姓周封箕子于朝鮮支子仲食采於于因氏鮮于綱目稱箕子封於朝鮮其子食采於于因姓鮮于趙孟頫贈鮮于樞詩箕曰箕子之後多髯翁鮮于之爲箕子後不旣章明較著矣乎洪武間有鮮于景者爲中領別將其七代孫寔自泰川來居殿側今十年請以寔主箕子祀,........

참고//// 숭인전비(崇仁殿碑)
이 비는 1615년에 평양에 세워진 숭인전비(崇仁殿碑)이다. 숭인전(崇仁殿)은 기자(箕子)의 위패를 모신 전각으로서 고려 때인 1325년(충숙왕 12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숭인전비(崇仁殿碑)는 1613년(광해군 5)에 세운 것으로서 비문은 이정구(1564~1635년)가 찬하였다. 그러나 정작 비가 세워진 것은 24년 뒤인 1637년(인조 15년)의 일이다.내용은 기자가 동방에 공자의 도를 전한 공로를 서술하고 광해군이 평안도의 사인들의 소를 받아들여 전호를 「숭인」이라 하고 기자의 후예인 선우연(鮮于寔)을 殿監에 임명하여 자손으로 계속케 한 것 등이다.조선시대 기자에 대한 인식의 한 면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자세한 원문과 번역문은 아래에서 확인하기 바람.
http://gsm.nricp.go.kr/_third/user/viewer/viewer03.jsp

좀 더 많은 부분을 찾아 보고 싶은 분께는 조선왕조실록을 권합니다.
( http://e-kyujanggak.snu.ac.kr/sub_index.jsp?ID=JWS )

‘崇仁殿碑文’과 ‘淸州韓氏의 족보’에 나타난 차이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았다면,.............. 족보가 가지는 한계와 허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글을 무단으로 표절한 표절자는 필자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표절자 자신의 주장을 폐기처분할 수 있는 내용을 품고 있는 글이데,... ㅋㅋ



그리고 두 번째 글
표절자는 필자의 후한서 준왕에 대한 번역문에 이어서,,,
/////
***준왕은 장도에서 위만에게 밀려 수천의 백성들을 대리고 바다로 도주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는 기록입니다.그는 선인왕검께서 건국한 고조선의 평양에서 밀려나 장산군도의 마안도(마한도)에 들려 임시 수도를 세웠다가 그곳에서 서거하자 후손들이 대동강 평양으로 상륙하여 삼한을 통치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 라는 설명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필자의 다른 글들을 조금만 읽어 보면, 준왕이 지금의 평양에서 한반도의 서남단으로 바다를 통하여 남천(도망)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인데,......
도대체 필자의 번역에 무슨 숨은 뜻이 그렇게 많다는 건가?


그리고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필자의 진서 卷三十六 列傳第六 張華전을 댓글로 인용한 부분이다.

구산진서 卷三十六 列傳第六 張華전에

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曆世未附者二十余國,並遣使朝獻。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한을 설명하는 대목에 유주로 부터 마한까지의 거리가 4천여리라고 하고 산에 의지하여 바다에 둘려있다고 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남한을 지칭한것이라면 거리가 전연히 맞지않고 산에 의지하여 바다에 둘려있다는 설명이 맞지를 않습니다.


東夷馬韓新彌諸國 依山帶海 去州四千餘里。 曆世未附者二十余國,並遣使朝獻。

풀이:東夷馬韓新彌諸國 동이 마한에서 새롭게 일어난 여러 나라는 “依山帶海” 산에 의지하고 바다에 싸여있는데, “去州四千餘里” 거리는 유주로부터 4천여리이다.
역세로 내부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X2009/03/11


이 글 또한 필자의 “晉書에 기록된 마한 진한 그리고, 裨離等十國”에 있는 번역부분을 표절한 부분이다. 東夷馬韓新彌諸國이 바로 산에 의지하여 바다에 둘려 싸여있는, 지금의 한반도의 전라도와 인근지역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 곳이 바로 馬韓지역인데,... 그리고 그 馬韓지역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가 3세기 후반에 발해만 북단에 있는 晉의 유주로 이주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었다. 그 東夷馬韓新彌諸國이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이 아니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구산’이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에게 요청합니다.
이 글을 보신다면 출처 표시없이 표절되어 있는 필자의 글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필자의 글이 표절되어 있는 글의 주소 :
http://www.baedalguk.com/bbs/zboard.php?id=fre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82&PHPSESSID=10ca7bc5d1bb92192de508cf43d1eaef

기분이 ㅈ같다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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