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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miri(2011-03-30 21:05:37, Hit : 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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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 고구려전에 보이는 고구려왕의 책봉명 Ⅰ
송서 고구려전에 보이는 고구려왕의 책봉명 Ⅰ






1. 땅의 소유권은 늘 변동을 한다. 고대의 경우 침략전쟁으로 인한 땅의 소유권이 변한 경우가 수 없이 많이 있었다. 나는 한 번씩 ‘내가 살고 있는 땅의 임자가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곤 하는데, 그럴 때 마다 ‘아마 그 땅에 붙박이로 살면 주인이겠지’라고 스스로 답변을 해본다.




2. 우리나라 사람 중에 독도에 주민등록을 한 사람들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인도 독도에 주민등록 비스무리한 것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 것 같고.,, 근데 대한민국 국민 중에 간도로 주민등록을 한 사람을 필자는 하나도 못 봤다. 일부 간도가 우리나라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과연 간도가 우리나라의 땅일까?




3. 장수왕 시절은 중국의 왕조들과 큰 마찰없이 서로 평온한 시절이었다. 그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송서 고구려전에 그 답이 있다. 송나라는 서기420년부터 478년까지 60년을 존속한 나라이다. 기록을 살펴보자.

東夷高句驪國,今治漢之遼東郡。高句驪王高璉,晉安帝義熙九年,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高祖踐阼,詔曰:「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璉,使持節、督百濟諸軍事、鎮東將軍、百濟王映,並執義海外,遠修貢職。惟新告始,宜荷國休,璉可征東大將軍,映可鎮東大將軍。持節、都督、王、公如故。」三年,加璉散騎常侍,增督平州諸軍事。 ///이하 생략,.. --- 宋書 卷九十七 列傳第五十七 夷蠻





송서 고구려전의 앞부분에서 東夷高句驪國을 ‘1). 문장의 일부로 보느냐?’, 아니면 ‘2).제목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에 조금의 차이가 있으나 크게 뜻이 변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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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東夷高句驪國,今治漢之遼東郡。高句驪王高璉,晉安帝義熙九年,
東夷 高句驪國은 지금 漢의 遼東郡을 다스린다. 高句驪王 高璉이 晉安帝義熙九年(서기413년)에,...

2). 東夷高句驪國,今治漢之遼東郡。高句驪王高璉,晉安帝義熙九年,
東夷 高句驪國,, 지금 한의 요동군을 다스리는 高句驪王 高璉이 晉安帝義熙九年(서기413년)에,...

어느 것이나 高句驪王 高璉이 옛날 漢나라의 遼東郡을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다는 것으로, 쉽게 예전에는 한나라의 땅이었는데 지금의 고구려의 땅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2번이 해석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今’이라는 표현은 송나라가 존속하던 서기420년부터 478년의 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부여를 탈출한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이후 고구려가 주변의 여러 지역을 영토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역대 중국왕조와의 마찰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고구려가 건국되던 시기의 주변 정세는 남쪽으로 낙랑군을 위시한 중국의 군현이 존재하였으며, 서북으로는 요동군이 있었고, 북쪽으로는 부여라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구려의 영토확장은 필연적으로 중국왕조의 동방군현과의 전쟁을 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자의 예전 글 ; http://blog.paran.com/livemiri/35547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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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의 기록을 보면 漢족이 동이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가 가장 넓었던 시기가 漢나라 시절이며, 그 당시 한반도 북부에는 한의 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토)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그 4군지역을 자신들의 고유영역으로 인식하였으며, 각 왕조마다 군사를 파견하여 동이족(예, 맥, 한)과의 군사적인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현토군은 고구려에 의하여 일찍 요동으로 물러났으나, 樂浪은 4세기 초까지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존치되어 있다가 결국 고구려에 의하여 대방군과 같이 축출을 당한다.(낙랑 313년, 대방 314년) 그 후 鮮卑族 慕容氏가 지배하던 요서지역으로 옮겨진다. 이제 고구려는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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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정복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할 때 마다 중국왕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는 것이다. 한정된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였다면 당연히 국경선에는 변화가 생기고, 어떠한 이유에서 건 안정을 취할려면 서로 간에 변경된 국경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한다.

근현대의 경우도 인류는 크고 작은 전쟁을 수 없이 경험하였으며, 그 전쟁이 종료된 후에는 이해 당사국들 간에 조약이 체결되면서 국경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전쟁과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간도문제 또한 중국과 북한은 서로 마찰을 겪다가 1962년 비밀 변경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1964년 국경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백두산 천지의 중간을 지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양국간의 국경을 확정하게 된다.




고구려의 영토확장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삼국지 東沃沮의 기록을 살펴봐야한다.
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

漢武帝에 의하여 원산만 유역의 북부지역에 처음 설치되었던 玄菟郡은 부여와 그 주변의 濊족 貉족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려는 전진기지 정도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 현토군은 夷貊(고구려를 구성할 貊족으로 파악됨)의 침략을 받고(기원전75년경), 句麗의 西北으로 옮겨간다. 즉 貊족이 한의 현토군을 침략하여 그들을 축출한 것이다. 그 후 옥저지역은 여러 정치적 상황을 겪다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는데, 이 때 옥저지역의 상황이 삼국지 東沃沮전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國小,迫於大國之間,遂臣屬句麗。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使相主領,又使大加統責其租稅,貊布、魚、鹽、海中食物,千里擔負致之,又送其美女以爲婢妾,遇之如奴僕。


이처럼 고구려는 건국(서기전37년) 이후 동쪽의 현토군이 축출된 옥저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한다. 그 후 계속하여 남쪽으로 낙랑, 대방군을 축출하였다.(낙랑 313년, 대방 314년)




고구려에 의하여 축출된 중국왕조의 동방군현들은 발해만 북단으로 옮겨가는데, 고구려는 급기야 요동지역마저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송서 고구려전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東夷高句驪國,今治漢之遼東郡。’이라는 기록이다. 고구려가 한나라 시절의 요동군을 차지하고 있으니, 중국왕조의 입장에서는 그 땅에 대하여 무력을 행사하여 빼앗거나 아니면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을 해줘야 할판이다.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 고구려와 국경을 접한 발해만 북단에서의 역사적 사건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발해만 북단 지역은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전연이 서기 370년에 망한 이후 後燕(384∼409), 南燕(398∼410)이 명멸하였다. 그 후 後燕의 장군 馮跋이 漢人왕조인 北燕(409~438)을 세웠는데, 436년 北魏군에 의해 용성이 함락되고 跋의 동생인 2대 天王 弘이 고구려로 도망하였으나, 438년(장수왕 26) 北豊에서 장수왕에게 죽음을 당하여 2대 28년 만에 멸망함으로써 모용씨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晉書에는 고구려전이 입전되어 있지 않아 많이 아쉽지만, 진서 지리지 平州 관련 항목에는 선비 모용씨의 기록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平州初置,以慕容廆為刺史,遂屬永嘉之亂,廆為眾所推。及其孫俊移都於薊。其後慕容垂子寶又遷於和龍,自幽州至子廬溥鎮以南地入於魏。慕容熙以幽州刺史鎮令支,青州刺史鎮新城,並州刺史鎮凡城,營州刺史鎮宿軍,冀州刺史鎮肥如。高雲以幽、冀二州牧鎮肥如,並州刺史鎮白狼。後為馮跋所篡,跋僭號於和龍,是為後燕,卒滅於魏。 --- 晉書 卷一十四 志第四 地理志 上

東晉은 419년에 멸망하였는데 위 기록은 동진이 멸망한 이후의 상황인 後燕이 서기 436년 (북)위에게 멸망한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고구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번에는 본기를 살펴보자.
晉의 安帝 義熙九年(서기413년)의 기사 말미에 ‘是歲,高句麗、倭國及西南夷銅頭大師並獻方物。’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이 바로 송서 고구려전에 보이는 晉安帝義熙九年,遣長史高翼奉表獻赭白馬。以璉爲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인데, 진서의 기록보다 송서의 기록이 훨씬 분명하다. 필자는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진서에 고구려전이 입전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사실 진서는 당나라 太宗의 지시로 房玄齡 등이 서기 644년에 편찬한 晉의 正史기록이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이 진서는 송서(沈約이 488년에 편찬)나 南齊書(소자현이 537년에 편찬) 등 보다 편찬시기가 더 늦다. 필자는 앞서 [진서 사이전 裨離等十國]의 기록에서 자료를 편집하면서 원사료가 조금 산실되어 기록에 선후가 바뀜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 중 하나가 ‘臣芝’관련 기록으로 이는 마한전에 들어 가야할 내용이다. 그리고 또 진서 마한전의 기록을 보면
武帝太康元年、二年,其主頻遣使入貢方物,七年、八年、十年,又頻至。 太熙元年,詣東夷校尉何龕上獻。 咸寧三年復來,明年又請內附。 라고 되어 있다. 이 곳에도 咸寧, 太康, 太熙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이러한 편집내용을 보면 송서나 남제서 등 앞서 편찬된 정사를 이용하여 보충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원사료의 산실된 것을 校勘하지 아니하고 최대한 존중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원사료에는 고구려와 관련하여 ‘遣使入貢方物’ 등의 기록이 있었을텐데 그 자료의 산실로 인하여 입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며 그러한 연유로 진서 安帝본기에 高句麗라는 국명만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참고///////
太康 西晉의 연호 280년~289년에 해당
太熙 원년 290년
咸寧 西晉의 연호 275년~279년에 해당




강성한 고구려에 대하여 晉의 安帝가 高句驪王 高璉에게 詔를 내려 ‘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으로 책봉하게 된다. 고구려가 먼저 晉에 表를 보내서 양국 사이에 외교관계가 조성되었을 것이며,(이 때가 서기 413년으로 장수왕 1년이다.) 이러한 장수왕에 대한 책봉은 장수왕 이전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이어져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광개토대왕이 5만의 대군을 한반도 남단으로 보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고구려의 서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왕조와의 안정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감사합니다.
ver. 0.0012.0228









잡담 :
벌써 춘3월도 마지막 날이 다가오네요. 4월에는 온천지가 꽃들로 만발할 텐데, 따뜻한 날을 골라 도시락을 준비하고 꼭 꽃놀이를 가야겠어요.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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