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livemiri(2011-07-12 17:53:01, Hit : 0, Vote : 0)
연결 #1
http://blog.paran.com/livemiri
연결 #2
livemiri@paran.com
제목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한 이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한 이해




한국고대사에 있어서 신라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의 잘못된 번역에서부터 시작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의 기록은 3세기 한반도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석씨신라의 기록이다. 그러나 잘못된 번역과 그로 인한 잘못된 이해가 통설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신라는 4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춘 나라로 인식하고 있으며, 또,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의 많은 부분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신라본기의 기사를 취사선택하여 역사를 이해하려고 하려는 경향이 있다.


너무나 잘못된 방법론이다.

신라본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왕력에 대한 제대로 된 복원이 이루어져야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 누구도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의 왕력을 제대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사실 신라의 왕력은 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그 뒤죽박죽되어 있는 본기의 왕력을 질서정연하게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가 있는데 그 것이 바로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왕호들이다. 필자는 예전의 글에서 이 왕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놓았다. 이를 통하여 신라는 혁거세왕으로 부터 시작된 박씨신라가 아달라왕을 마지막으로 종막을 고하고, 그 뒤를 이어 지금의 경주 땅에는 석탈해를 새로운 왕으로 하는 석씩신라가 세워지는데, 그 후 세월이 흘러 석씨신라의 마지막왕인 흘해왕이 붕어하고 난 후 미추왕에게 왕권이 이어지면서 석씨신라는 또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 석씨신라는 신라의 남쪽과 서쪽의 땅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하여 영토를 확장하는데, 남쪽으로 한반도의 남부지역과 그 해안가에 존재하던 加耶를 정벌하여 자신의 영역에 편입시킨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에 보이는 ‘포상팔국전쟁’이라는 것으로, 나해이사금본기와 물계자전에서 그 전쟁의 모습을 살필 수가 있다. 이 전쟁 이후 삼국사기에는 加耶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전쟁을 통하여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실질적인 주인이 된다. 또, 서쪽으로 마한을 정벌한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자료가 너무 적어 자세하게 살피지 못하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그 때의 상황을 잘 전해주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을 보면 辰王이라는 존재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辰王이 바로 그 당시 韓의 영역을 다스리는 바로 석씨신라왕인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을 보면 이 辰王은 마한인을 이용하여 낙랑지역으로부터 건너온 유이민인 古之亡人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씨신라의 辰王이 다스린-낙랑으로부터 건너온 유이민들은 바로 박씨신라를 건국한 주체세력들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朝鮮유민들이 마한으로부터 그 동계지를 얻어서 山谷간에 거쳐하며 사로6촌을 형성하였으며 혁거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박씨신라가 시작된다.


이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낙랑지역에서 이주해온 朝鮮유민들에 의하여 박씨신라가 세워졌다. 이 지역은 土着(馬)韓人들과 새롭게 이주해 온 朝鮮유민이 혼재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가는 용광로의 불길 속과 같은 변혁의 땅이었다.


박씨신라가 세워지고 안정을 취하자 그들은 경주지역의 땅을 재편하는데, 이때 新羅六部가 처음으로 만들어진다. 이 신라육부라는 표현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도 죽 기록이 되어 있으며, 또 이 新羅六部는 6세기 초반의 기록인 [울진봉평신라비]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이는 석씨나 김씨 신라인들이 박씨신라가 만들어 놓은 경주지역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용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형제 사이나 부자지간에도 部名이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하여튼,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에서 석씨신라의 모습을 살펴보면, 진왕은 마한의 월지국을 다스린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신라는 이른 시기부터 백제와 전쟁을 하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다루왕 37년(서기64년)에 신라와 와산성, 구양성(지금의 충북 보은과 옥천)에서 첫 전투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다루왕 49년(서기76년)까지 12년간 무려 6회나 전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개루왕 38년(165년)까지 약 90년간 전쟁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다시 서기204년까지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후로도 백제와의 많은 전쟁기록이 보인다. 필자는 이 신라와 백제의 전쟁에는 마한의 개입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마한이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백제와 수많은 전쟁을 하는데, 이렇게 전쟁을 하는 지역이 바로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임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잘못된 해석과 번역을 통하여 이 시기 한반도가 70여개 나라가 버글버글하는 상태로 이해하고, 4세기까지도 신라가 경주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주장의 글들을 볼 때 마다 필자는 그러한 것이 진정 코미디며 개그인 것 같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때가 많다.


삼국사기를 보면 마한지역을 지배하는 신라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벽골제에 대한 기록이 바로 그 것이다.

訖解尼師今(서기330년)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21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참고 // 삼국사기에서 訖解尼師今의 재위기간을 서기310년부터 356년으로 기록하였지만, 필자는 訖解尼師今의 年代記의 기록은 신라왕력의 복원에 따라 김씨 미추왕의 기록으로 이해하고 있음



지금의 전북 김제 지역에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를 축조하려면, 그 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를 기반이 있어야 한다. 그 지역이 언제든 전쟁을 통하여 땅의 임자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지역이었다면 대토목공사가 이루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이는 碧骨池관련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辰王治月支國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 바로 辰王 즉 석씨신라왕이 마한의 月支國을 다스리며, 그 근처의 그 땅에 거대한 저수지를 축조하는 대토목공사를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라가 3~4세기 한반도 남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신라는 흘해왕을 마지막으로 김씨 성을 가진 미추에게 왕권이 넘어가면서 또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김씨신라가 새롭게 시작되는데 미추왕을 이어 내물왕이 즉위하는 혼란기에 또 다시 신라땅에는 거대한 변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때까지 신라의 일부였던 변한(加耶)땅에서 새로운 독립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바로 신라본기에 다시 등장하는 加耶의 실체를 확인하면 이제 4말5초의 한반도가 명확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많은 연구자들은 이 4말5초에 신라땅에서 일어나는 대변혁의 기운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작 이때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려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듣곤 한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0000.0714伏





잡담 : 복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네요. 이제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릴 텐데, 모두 건강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Posted by livemi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