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초간보(初刊譜)의 「청주한씨 전대사적(淸州韓氏前代事跡)」과 계대(系代) 본문 첫 면, 1617년, 목판본,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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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 대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准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위 기록에서 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부분이 진수의 원문이고, 《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그 아들과 친척은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因冒姓韓氏[冒姓은 남의 성을 가져다 쓰는 것, 한씨라는 성을 모성하였기에]。准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준왕은 해중(즉 마한땅, 바다로 도망했기에)에 있으면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부분은 배송지가 위략에서 인용한 주석문이다.
참고 : 위략의 저자는 평양의 낙랑지역과 마한지역이 육지로 연결되어있다는 지리적 관념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준왕이 바다를 통하여 도망갔으니 마한지역을 황해의 어느 섬으로 인식하여 海中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상황을 조금 설명하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준왕이 위만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평양지역에서 좌우궁인을 데리고 바닷길로 도망하여 마한지역으로 내려와서 그곳에서 새롭게 ‘韓王’을 자처하니, 평양지역에 남아있던 준왕의 아들과 친척들이 준왕이 자칭한 ‘한왕’에서 ‘韓’을 따와 姓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위 기록은 평양지역에 처음으로 ‘韓’을 성으로 사용한 사람이 탄생한 순간을 알려준다.
자!!! 위 그림화일의 기록을 보면, 족보의 찬자는 위지의 “기자의 후손 준(準)이 위만에게 축출되어 마한을 건국하면서 자손들이 韓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록과 기자의 자손 중 우평(友平)의 후손은 선우씨, 우량(友諒)의 자손은 한씨, 우성(友誠)의 자손은 기씨가 되었다”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준왕과 청주한씨 시조 한란까지의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는다.
근데 재미있는 것이 있다.
友平, 友諒, 友誠이라는 기자의 자손들은 友를 돌림자로 쓰는데, 이에 대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위의 삼국지 한전의 기록이다.
삼국지 한전은 판본에 따라 ‘其子及親留在國者’의 ‘及’이 ‘友’로 확인되는 판본이 있다. 아마 족보를 처음 만든 당사자들이 살펴본 판본이 ‘其子友親留在國者’이었을 것이다. 즉 ‘그의 아들 우친은 나라[평양]에 머물러 있으면서’로 이해하여 友자 돌림의 형제들 友平, 友諒, 友誠을 창출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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