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쓴 이  
   livemiri  (2013-04-12 18:26:58, Hit : 0, Vote : 0)
연 결 #1  
   http://livemiri.tistory.com/
연 결 #2  
   livemiri@hanmail.net
제     목  
   『광개토대왕릉비문』과 고구려의 왕통 교체

『광개토대왕릉비문』과 고구려의 왕통 교체





,,,,,,(이전 생략)
아마 秦始皇帝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후손이 皇帝位를 계승하면서 二世, 三世, 四世,.... 萬世까지 秦이 지속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始皇帝가 언급한 二世, 三世,.. 등의 명칭은 父子계승만을 염두에 두고 붙이는 명칭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전왕에게 후사가 없어 부자계승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며, 또는 황실 내부의 역모로 인하여 父子왕통이 단절되는 경우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그래서 二世, 三世, 四世,.... 등은 皇帝位에 오르는 순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秦三世皇帝의 출자와 관련된 여러 설 중 둘째나 셋째 등의 경우도 부자계승과는 상관없는 경우이다. 하여튼 秦이 3대로 종막을 고함으로써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낼 수 없어 아쉽다.

그렇다면 다시 『광개토대왕릉비문』으로 돌아가서 十七世孫이라는 표현 또한 王位에 오르는 순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더러 연구자에 따라서는 추모왕과 광개토대왕 사이에 父子祖孫관계를 적용시켜 4~5대의 왕력이 탈락되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필자의 판단으로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기록에 맞춰 왕력이 작성되어 있다. 즉 추모왕과 그의 世子 儒留王을 제외하고 그 뒤를 이은 大朱留王을 기점으로 광개토대왕은 17世가 된다. 이처럼 『삼국사기』에 작성되어 있는 왕력 대수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기록과 잘 대응한다.

顧命世子儒留王, 爾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유명을 받은 世子 儒留王이 道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다스렸으며, 대주류왕은 基業을 이어 받들었다. [遝](livemiri 주 : 윗부분에 四자가 남아있다. 朴時亨은 遝으로 파악하였다. 필자는 이 글자를 대주류왕과 광개토대왕 사이의 세대수를 알려주는 부사어 정도로 추측한다.) 17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삼국사기』 「高句麗本紀」에 기록된 고구려의 초기 왕계를 살펴보면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나타난다. 앞서 필자가 요약 정리한 것을 필요한 부분만 좀 더 축약하면 아래와 같다.

1. 解慕漱의 아들 朱蒙(비문:鄒牟王),
2. 失蒙의 元子 琉璃(비문:儒留王),
3. 琉璃王의 第三子 大解朱留王(비문:大朱留王)
4. 解朱留王의 弟 解色朱
5. 解朱留王의 元子 諱解憂(一云解愛蔞)

그런데 6대 大祖大王(或云國祖王)에 대해서는 즉위 기록에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이라고 하였지만, 그 말미에 김부식은 사론을 달아두었는데 그 사론의 『해동고기』를 인용한 기록을 보면 ‘高句麗 國祖王 高宮’이라고 되어 있다. 이기록을 통하여 『삼국사기』 「高句麗本紀」 「大祖大王(或云國祖王)본기」는 高를 姓으로 가지는 高宮의 「본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추모왕부터 5대를 내려온 解씨 왕통이 6대 大祖大王(或云國祖王) ‘宮’에 이르러 高로 성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大祖大王(或云國祖王) 代에 이르러 고구려왕실이 새롭게 ‘解’에서 ‘高’로 성을 바꾸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三國志』 「위지」 「동이전」 「고구려전」을 좀 살펴보자.

本有五族,有涓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涓奴部爲王,稍微弱,今桂婁部代之。<중간 생략> 伊夷模無子,淫灌奴部,生子名位宮。伊夷模死,立以爲王,今句麗王宮是也。其曾祖名宮,生能開目視,其國人惡之,及長大,果凶虐,數寇鈔,國見殘破。今王生墮地,亦能開目視人。句麗呼相似爲位,似其祖,故名之爲位宮。位宮有力勇,便鞍馬,善獵射

<번역 생략>
본래 涓奴部가 王을 하였는데 차츰 미약해져 지금(今)은 桂婁部가 王位를 대신한다.
<번역 생략>
지금(今)의 句麗王 (位)宮이 이 사람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宮이었는데,....
<번역 생략>

위 기록에 보이는 (位)宮은 『삼국사기』 「高句麗本紀」에 기록되어 있는 東川王(재위기간 서기 209년 ~ 248년)이다. 그래서 『三國志』 「위지」 「동이전」 「고구려전」에 보이는 ‘지금(今)’이라는 표현은 『三國志』가 작성된 시기인 서기 280년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고구려전」을 작성하기 위해 수습되었던 원사료가 기록된 시점을 의미한다. 필자는 이 원사료는 幽州刺吏 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얻은 것으로 판단한다.

『삼국사기』 「高句麗本紀」의 왕력과 『三國志』 「위지」 「동이전」 「고구려전」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추모왕으로부터 이어진 解씨 왕통은 涓奴部에 대응하며 지금(今)의 句麗王 (位)宮[즉 『삼국사기』의 동천왕]은 桂婁部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位)宮의 증조인 宮 또한 계루부이다. 이것을 통하여 『삼국사기』 「高句麗本紀」 「大祖大王(或云國祖王)본기」의 즉위년 기록에 보이는 ‘大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는 『三國志』의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宮의 姓이 같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그의 姓은 解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동고기』에 보이는 ‘高句麗 國祖王 高宮’이라는 표현은 『三國志』에 기록되어 있는 왕통교체의 사실과 잘 부합한다. 즉 解에서 高로 王姓이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국사기』 「高句麗本紀」와 『三國志』 「위지」 「동이전」 「고구려전」의 기록으로부터 涓奴部의 句麗는 解씨가 王姓인 것을 알 수 있으며 桂婁部의 高句麗는 高씨가 王姓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왕성의 차이로부터 6대 大祖大王(或云國祖王) 代에 이르러 解씨 왕통이 단절되었음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삼국사기』 「高句麗本紀」에 大祖大王(或云國祖王)의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는 차대왕, 신대왕 관련 기록도 살펴보자.

『삼국사기』 「高句麗本紀」에 따르면 大祖大王(或云國祖王)은 7세의 어린 나이인 서기 53년에 왕이 된다. 이후 94년간 재위에 있다가 서기 146년 동생인 차대왕에게 왕위를 讓位한다. 차대왕은 태조왕의 24살 아래의 동생으로 76세가 되는 서기 146년에 재위에 올라 서기 165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 때 大祖大王(或云國祖王)과 차대왕은 같은 나이에 죽는다. 마지막으로 신대왕은 大祖大王(或云國祖王)의 42살 아래의 동생으로 77세가 되는 서기 165년에 재위에 올라 15년간 나라를 다스린 후 서기 179년 91세로 사망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사실 『삼국사기』 「高句麗本紀」에 보이는 왕들 사이에 생물학적인 불합리로 인하여 고구려의 초기 왕력이 조작이라는 주장을 하는 연구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삼국사기』 「高句麗本紀」에 기록되어 있는 왕력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 대조대왕 서기53년(7세)  146년 양위  165년(119세) 사망
  琉璃王(서기18년 사망) - 古鄒加 再思 - -| 차대왕  서기146년(76세) 165년(95세) 사망
                                                         | 신대왕  서기165년(77세) 179년(91세) 사망

이처럼 앞서 언급하였듯이 분명 추모왕으로 이어지는 涓奴部의 句麗는 解씨가 王姓이다. 그러니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는 ‘高宮’과 동일 인물이 될 수가 없다. 또 생물학적 수명을 교려할 때 大祖大王(或云國祖王), 차대왕, 신대왕은 서기 18년에 사망하는 琉璃王과 祖孫관계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계보가 만들어진 근본 이유는 바로 <涓奴部>에서 <桂婁部>로의 왕통교체를 숨기기 위한 조처로써 大祖大王(或云國祖王) 高宮을 涓奴部의 解씨왕통에 연결시킴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이제 이 연결고리를 끊어 고구려의 왕통을 분리시켜보자.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涓奴部>에서 <桂婁部>로 고구려의 왕통이 교체되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삼국사기』 「高句麗本紀」 「大祖大王(或云國祖王)본기」 말미에 김부식이 붙여놓은 사론 부분의 『후한서』와 『해동고기』를 인용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봐야한다. 한 번 더 그 기록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後漢書云 安帝建光元年 高句麗王宮死子遂成立 玄菟太守姚光上言 欲因其喪 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陣忠曰 宮前桀黠光 不能討 死而擊之 非義也 宜遣弔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 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案海東古記 高句麗國祖王高宮 以後漢建武二十九年癸巳(巳 當作丑) 卽位 時年七歲 國母攝政 至孝桓帝本初元年丙戌 遜位讓母弟遂成 時宮年一百歲 在位九十四年 卽建光元年 是宮在位第六十九年 卽漢書所記與古記 抵梧不相符合 豈漢書所記誤耶
///////
『後漢書』에 이르길 안제 건광 원년(서기 121년)에 고구려 왕 宮이 죽고 아들 遂成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 생략>
高句麗 國祖王 高宮은 후한 건무 29년(서기 53년) 계사에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 병술(서기 146년)에 이르러 母弟 遂成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고 재위 94년이였다.
그러므로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 69년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달라 서로 합치하지 않는다. 어찌 『[후]한서』에 기록된 것이 잘못되었는지??

『後漢書』의 기록에 따르면 安帝 建光 元年(서기 121년) 高句麗王 宮이 죽고 아들 遂成이 왕위에 오른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사기』 「高句麗本紀」 「大祖大王(或云國祖王)본기」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大祖大王(或云國祖王)본기」가 연속된 두 왕의 본기를 합쳐서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大祖大王(livemiri 주 : 사실 『三國史節要』에는 大가 太로 기록되어 있어 많은 연구자는 太祖大王으로 칭한다.) 또는 國祖王이라는 의미는 建國主에게만 붙일 수 있는 시호이다. 고구려의 건국주는 추모왕이지만 이는 <涓奴部>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三國志』 「위지」 「동이전」 「고구려전」은 位宮을 <桂婁部>라 하였다. 그렇다면 <桂婁部>로써 처음 왕위에 오른 왕은 누구일까? 이는 다름 아닌 位宮(『삼국사기』의 동천왕)의 선조이며 大祖大王 或云 國祖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宮이 될 수밖에 없다. 고구려인들은 始祖 추모왕에게 太祖나 國祖라는 시호를 붙여주지 않았다. 고구려의 건국주는 분명히 추모왕이지만 <桂婁部>가 왕권을 장악하고 또 그들에 의하여 왕력이 편집되는 과정에 자신들의 始王인 宮에게 大祖大王(或云國祖王)이라는 시호를 붙였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둘로 나눈 「大祖大王(或云國祖王)본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답은 바로 大祖大王(或云國祖王) 즉위 기록에 있다. 앞서 필자가 지적한 대로 大祖大王(或云國祖王)에 대하여 ‘宮’과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라는 두 개의 기록이 동일한 사람인 양 기록되어 있다. 이 자체가 바로 「大祖大王(或云國祖王)본기」가 두 왕의 本紀를 합쳐서 기록했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그래서 ‘大祖大王(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는 ‘宮’과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로 나누어진다.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가 해씨 왕통의 마지막 혈통을 기록한 것이며, 그의 뒤를 이어 高씨의 句麗(즉 高句麗)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宮은 國祖王(大祖大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이다. 분명 高宮이라고 되어 있다. 『해동고기』를 다시 읽어 보자.

“高句麗 國祖王 高宮은 후한 건무 29년(서기 53년) 계사에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 병술(서기 146년)에 이르러 母弟 遂成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 高宮이라는 기록이야말로 고구려인들이 <涓奴部>에서 <桂婁部>로의 왕권 교체를 숨기면서 남겨놓은 흔적이며, 또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왕력 대수와 일치시켰음을 알리는 부분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후한서』의 기록을 근거로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분리된 「大祖大王(或云國祖王)본기」의 앞부분은 해씨 왕통의 마지막 왕인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필자는 ‘小名於漱 琉璃王子古鄒加再思之子也’에서 ‘於漱는 再思의 아들이 아닌가?’ 추측한다. 琉璃王이 서기18년에 사망하였고 그 이후 손자 於漱가 서기 53년에 제 6대왕으로 왕위에 올랐다가 서기 121년 사망함으로써 <涓奴部>의 해씨 왕통은 종막을 고하는 것이다. 이처럼 『후한서』와 『해동고기』의 기록을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고구려 왕력의 실체를 보는 것이 史家의 눈인 것이다.

참고로 시조 「동명성왕본기」를 보면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賜姓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필자는 이것을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의 성씨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인들은 국초부터 성을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후 생략)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0.000999.0408






















잡담 :

@bangmo
그래도 이외수는 파우스트보다 위대하다. 파우스트는 생모를 몰아붙여 생모가 영아를 물에 빠뜨려 죽였다. 이외수는 지 손으로 직접 입양기관으로 들고 갔다. 이를 두고 "참으로 자비롭다"고 한다.
오전 4:27 4월 10일 (수)


Posted by livemi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