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 3. 삼국유사 고조선[王儉朝鮮]조에 인용된 魏書
단군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고조선[王儉朝鮮]조에 인용되어 있는 고기의 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야기의 구조는 아주 단순하다. 天帝인 桓因의 아들 桓雄이 인간세상에 뜻을 품고 강림하여 곰에서 인간으로 化한 웅녀와 관계를 맺어 壇君을 낳았는데, 그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朝鮮이라 하였다. 그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다 나이 1908세가 되어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분명 창작된 이야기이다.
삼국유사를 읽다보면 後百濟의 甄萱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 기록을 보면 三國史本傳, 李碑家記, 又(또) 古記를 인용하고 있다. 그 중 古記에는 後百濟의 甄萱에 대한 건국과 멸망에 대한 과정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古記가 편집된 시기가 후백제의 멸망 이후인 고려시대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 古記의 기록을 보면 甄萱의 아버지를 지렁이로 표현하고 있다.
필자는 앞서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가 바로 단군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삼국유사는 고조선[王儉朝鮮]에 대한 기록도 古記를 인용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주몽)에게는 天帝인 桓因의 손자의 지위를 부여하여 기록하고 그 天帝의 손자의 나라를 계승한 것이 고려임을 표현하려고 한 반면, 경쟁관계에 있었던 後百濟를 건국한 甄萱에게는 담벼락 밑의 땅 속에 사는 큰 지렁이(아마 土^龍^ 정도)의 아들로 격하시켜 역사를 기록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상이 이러하다 보니 고조선이 실존하였다고 하거나. 아니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요동에 있었느니, 평양에 있었느니, 아니면 요동에서 건국되어 한반도의 평양으로 건너왔다느니 하는 논의들은 空念佛에 불과할 따름이다. 사실 ‘고조선이 존재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바로 삼국유사에 古朝鮮[王儉朝鮮]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한 바로는 삼국유사 고조선[王儉朝鮮]조의 기록은 오히려 ‘고조선’의 實存을 부정한다.
그런데 필자의 이러한 생각에 언제나 늘 따라다니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삼국유사 古朝鮮[王儉朝鮮]조의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魏書를 인용한 기록인데, 그 기록은 아래와 갔다. 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이 魏書의 기록은 古朝鮮[王儉朝鮮]조에서 古記를 인용한 기록의 축소판이다. 古記에 보이는 신화적인 요소를 걸러내면 전하는 바가 똑 같다. 그래서 이 기록에 보이는 魏書는 연구자에 따라서 예전에는 존재하였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史書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삼국유사는 古朝鮮[王儉朝鮮]을 기록한 후 前漢朝鮮傳(전한서 조선전)을 이용하여 魏滿朝鮮을 기록하였다. 근데 전한서 조선전을 살펴보면 朝鮮王 滿에 대하여 그의 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후대의 역사서인 진수의 삼국지에 이르러서야 燕亡人 衛滿이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또 후한서에도 燕人衛滿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일연이 삼국유사에 魏滿朝鮮을 인용하면서 魏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즉 삼국지 등)을 참조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 측 기록에 보이는 衛滿이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魏滿으로 변형되어 있다.
이번에는 삼국유사 北扶餘조의 기록을 보자.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見下.]
위의 기록은 古記를 인용한 기록인데 필요가 없는 글자가 하나 더 기록되어 있다. 그 것은 前漢과 宣帝사이에 있는 ‘書’라는 글자이다. 이것을 판각 과정에 일어난 잘못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일연의 의도된 誤字라 추측하고 있다.
魏滿朝鮮에 보이는 ‘魏’자와 前漢書宣帝에 보이는 ‘書’자를 조합하면 바로 古朝鮮[王儉朝鮮]조의 첫 줄에 보이는 魏書云의 魏書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일연은 古記의 기록을 보고 壇君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전해져 오던 ‘단군기’를 읽음으로써 그가 해모수와 동일한 존재임을 알게 되고, 단군을 기록한 古記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叙(余+又)曰로 시작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생략)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神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
그래서 그는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신비스러운 시조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어 상상 속 신화의 세계를 그럴 듯한 역사의 기록으로 만들어 자물쇠를 채워 버렸다. 그러나 일연은 자신이 채워버린 자물쇠를 풀 수 있도록 바로 옆에 열쇠도 은근슬쩍 남겨놓았다. 필자는 그 증표를 魏滿朝鮮에 보이는 ‘魏’자와 前漢書宣帝에 보이는 ‘書’자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高同時.”가 거짓기록(僞書=魏書)이니,.... ㅋㅋ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 0.10271112
잡담 : 밤공기가 많이 차네여. 그래서 아침 출근길에는 두꺼운 겨울옷을 입어야할 것 같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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