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miri (2010-07-01 17:57:45)
제 글에 관심을 가져주신 OOO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의 주장이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다고 하셨는데, 저의 이전 글들을 읽어 보셨는지요?
제가 이 게시판의 462번 글 “일본서기의 기년 복원”에서 응신의 재위기간을 계산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http://www.history21.org/zb41/view.php?id=discuss2008&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04
응신천황만이 아니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무에서 雄略천황까지의 기년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그 곳을 보면, 응신은 서기 390년이 재위원년이고, 그 후 13년을 재위한 후 仁德천황에게 서기 403년에 왕위를 물려줍니다.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된 영락10년은 서기 400년입니다.
저의 주장은 ‘한반도에서 응신이 서기390년 왕위에 오른 이후, 고구려와 한판 전쟁을 벌인 후 패하고, 일본열도로 도망가서 仁德이 즉위하기 전인 서기 402년에 죽어 일본열도에 묻혔다.’는 것입니다. 또, 일본열도로 도망간 해를 ‘영락10년의 전쟁 이후가 아닌가?’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응신의 일본열도 망명이 일본 천황가의 기원이라고 판단합니다.
또 일본서기의 저자들은 이러한 응신의 망명을 숨겨놓은 방편으로 응신의 分身인 신무를 만들어 일본서기 초대천황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무의 기록과 응신의 기록을 합쳐야 하나의 인격체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예를 보면 ‘위만에게 패배한 준왕이 낙랑땅에서 도망나와 韓地에서 새롭게 왕노릇을 하다가 죽어 韓地에서 묻힌 것’과 거의 같은 과정이라 보시면 될 것입니다.


응신의 분신인 신무는 19년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응신의 13년과 다릅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초대천황(?)의 기록을 지우고, 그 자리를 응신의 분신인 신무로 채워 넣었기 때문인데, 실질적인 초대천황은 가야의 수로왕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으로, 예전 글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의 글을 ‘저급한 민족주의에 기대어 재미보려는 자들이나 할 소리’라고 하셨는데 저를 겨우 그 정도의 사람으로 보신다니 무척 섭섭합니다. 저는 한 번도 민족주의에 기대어 재미를 볼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선조들이나 異民族이 기록한 글들을 통하여 “그 옛날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의 정체”[실질적으로 일어난 사실]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에 틈이 날 때 마다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급한 민족주의에 기대어 재미보려는 자들이나 할 소리’는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라가 왜에 인질을 보낼 정도로 허약했고, 왜는 신라를 위협해 인질을 데려갈 정도로 강했다고 크게 불쾌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또, 얼마 전 일제에게 36년간 강점을 당했다는 기억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그 당시 이 땅을 살았던 우리 선조의 역사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그 역사의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억하고, 앞으로 이것들과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지 않는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우리의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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