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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miri(2010-11-14 17:09:42, Hit : 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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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화 發 화랑세기]는 음란소설이 맞다.
[박창화 發 화랑세기]는 음란소설이 맞다.





삼국유사에서 진흥왕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화랑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第二十四眞興王. 卽位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百濟欲與新羅合兵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 삼국유사 眞興王조

그런데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에서는 기사의 절반을 진흥왕대 원화와 화랑에 대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당연히 진흥왕의 기사에 기록되어 있어야 할 내용이 자리를 옮겨서 미시랑과 진자의 행적을 기록하는 자리에, 그 것도 서두에 길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가?

필자는 이점을 ‘國仙의 시초와 역활’에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진흥왕 37년(서기 576년)에 화랑 중 최초로 薛原郞이 國仙에 임명되었지만, 그가 임명되자말자 진흥왕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마 국선 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되었지만, 그 것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할 실체(진흥왕)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薛原郞의 국선으로써의 명확한 행적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흥왕을 뒤로 진지왕(서기 576년에서 579년)이 재위에 오르면서 새롭게 國仙으로 未尸郎이 추대되어 임명된다. 그리고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진지왕을 뒤로 왕위에 오르는 진평왕대에는 수많은 화랑과 국선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문노, 居烈郞, 實處郞, 寶同郞, 庾信公 등) 그 중에 하나만 살펴보자.

삼국유사 金庾信조를 보면 “庾信公은 眞平王 17년 乙卯(서기 595년)에 났는데, 나이 18세가 되는 壬申(진평왕 34, 서기 612)년에 劍術을 익혀 國仙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그가 15세에 花郞이 되었다.”고 하니 이 해는 진평왕 31년이다.

위 두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은 15세(진평왕 31, 서기 609)에 화랑이 되고, 18세(진평왕 34, 서기 612)에는 國仙이 된 것이다.



이번에는 화랑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그 것을 좀 더 살펴보자. 앞서 필자가 잠깐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삼국유사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의 國史를 인용한 기록이 그 것이다. 그 기록을 다시 한 번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國史. 眞智王大建八年庚///miri주. 庚은 丙의 잘못///申始奉花郎. 恐史傳乃誤.(國史에 보면, 眞智王 大建 8년 庚申에 처음으로 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國史의 기록에 보이는 “眞智王大建八年(서기 576년)庚申始奉花郎”을 일연은 “恐史傳乃誤”라고 하였으면서도 그 것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이 점을 ‘未尸郎을 國仙에 임명한 기록’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최초로 薛原郞이 國仙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행적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진자에 의하여 未尸郎이 추천되고 그가 진지왕으로부터 國仙에 임명된 후, 그는 수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유사는 그에 대한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王敬愛之. 奉爲國仙. 其和睦子弟. 禮義風敎. 不類於常. 風流耀世幾七年. 忽亡所在.”라고 하여 그의 7년 동안의 행적이 범상하지 않음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의 說者曰을 통하여 그가 미륵으로 숭상받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그 점은 그의 행적이 그 당시 신라사회에 끼친 영향이 막대함을 나타낸다.

다음 구절을 보자.
路傍樹至今名見郎. 又俚言似如樹.[一作印如樹.]
그 당시 진자가 미사랑을 만났던 곳의 ‘길가의 나무(路傍樹)’는 지금의 이름이 見郎(진자가 그 곳에서 미시랑을 만났기 때문에)이고, 또 俚言으로 似如樹(似如 : 비슷하다. 즉 彌勒과 未尸가 비슷한 것으로 부터 연유된 이름)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진지왕 당시 未尸郎이 國仙으로써 수행한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남아있는 물적 증거이다.

그리고, 그 이전 설원랑의 ‘國仙으로써의 미미한 행위’에 반하여 未尸郎의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 자극제가 되어 진평왕 이후 화랑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國仙의 폭발적인 활동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마 ‘國史’의 기록은 ‘설원랑에 대한 기록의 부족에서 나타난 잘못된 고증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래서 일연은 그 당시 제1대 國仙인 설원랑의 기록을 발굴하여 ‘國史’의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라국왕에 의하여 임명된 國仙은
제1대 설원랑(진흥왕 37년, 서기 576년)
제2대(?) 미시랑(眞智王 大建 8년, 서기 576년) (陳의 太建 서기 569~582) 7년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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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 15세(진평왕 31, 서기 609)에 화랑이 되고, 18세(진평왕 34, 서기 612)에는 國仙




ㅋㅋ 이제 [박창화發 화랑세기]의 기록을 조금만 볼까요?

3세 風月主 모랑의 원문입니다.
毛郞者南毛之弟也 先是 法興大王以國公入百濟 與寶果公主有私 後寶果逃歸入宮 生南毛毛郞 皆有美色 未珍夫爲花郞 以毛郞爲副 有寵於太后 眞興大王九年 太后命爲三世風月主 以慰南毛之靈 魏公妻以女俊花 卽二花郞之女兄也 生一女俊毛 而早卒 遂以二花郞繼之
贊曰 東城之美 魏花之壻 大王之子 太后之好

위 글을 보면 毛郞을 진흥대왕 9년에 3세 풍월주에 삼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진흥왕 9년은 서기 548년이고 진흥왕을 이어 진지왕(재위기간 : 서기 576~579년)이 왕위에 오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전혀 일치하지 않지요?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風月主란 이상한(?) 명칭도 등장하는군요. 삼국사기에는 국선이나 風月主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고, 삼국유사에는 國仙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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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마누라를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상납하고, 5입질을 해대면서 왕실 여인네들에게 사랑(?)을 받는 꽃미남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창화 發 화랑세기]는 단지 음란소설일 뿐이다. 그 글 속에서 우리역사의 사실과 같은 작은 조각들의 일부분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박창화가 인식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유추된 소설적 구성과 상상을 기록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모든’과 ‘어떤’이라는 말이 있다. [박창화 發 화랑세기]가 김대문이 기록한 화랑세기라면 그 기록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의혹이나 모순이 설명되어지고 해명될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몇 개의 ‘어떤’ 것들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그 것이 김대문의 기록을 필사했다는 것이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있다.





예전부터 필자는 [박창화 發 화랑세기]를 아래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적어 보면,


“시골의 무허가 공장에서 불량식품이 만들어 졌는데, 그 것이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만병통치약처럼 포장되어 보여지는 것.”

그래서 필자는 박창화 관련 글들을 쓰레기통에 담아 똥통에 버린 지가 꽤 오래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0.000.1112












잡담 : 지난 금요일에 miri랑 좀 싸웠는 것 같았는데, ㅋㅋ 같이저녁 먹고‘ 술 한잔 하고, 늦은 시간이라 마지막 타임으로 상영하는 “부당거래‘를 봤어요. 집에 오는 길에 miri가 조금 풀어 졌더라구요. ㅋㅋ 그 날이 나랑 miri가 결혼한 날이더군요.

livemiri (2010-11-14 19: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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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글을 적으면서 딴 생각을 좀 했는 모양입니다. 지송지송^^ 다음 구절을 수정합니다.


절대로 말할 수 있다.
수정 ===> 절대로 말할 수 없다.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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