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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vemiri  (2013-05-06 10:55:17, Hit : 0, Vote : 0)
연 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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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고조선(王儉朝鮮)을 폐기 처분하다.
고조선(王儉朝鮮)을 폐기 처분하다.





고조선(王儉朝鮮)이라는 단어는 한국인에게 의미가 아주 크다. 한국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그 들의 선조가 최초로 만든 나라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으며 그 것을 맹목적으로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또 지금까지 고조선(王儉朝鮮)의 위치에 대한 논란도 제법 있었지만 이제는 ‘평양지역에 있었던 나라’로 정리가 되어가는 분위기다. 그런데 과연 고조선(王儉朝鮮)이 평양지역에 실존하였을까?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3단계의 사고를 해보자.

① 평양지역에 예전에 사람이 살았다.
② 평양지역에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
③ 평양지역에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는데, 그 것이 고조선(王儉朝鮮)이다.

위 3가지의 명제를 보면 ①의 경우는 그 땅에 기록되어 있는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한반도의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는 예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②의 경우처럼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나라를 이루고 살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문자기록에 의존해야한다. 즉 그 당시나 그 시대와 가까운 후세에 누군가가 그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한다든지 또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그 지역의 유물에서 국가의 이름이나 역사기록에 상응하는 명문들이 발견된다면 어떠한 나라가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예로 한반도의 구석구석을 이곳은 신라영역, 저곳은 백제영역 등등으로 파악하는데 『삼국사기』의 기록과 고고학적 유물을 이용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고조선(王儉朝鮮)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三國遺事』 「古朝蘇」조의 기록을 통하여 고조선(王儉朝鮮)이 평양지역에 존재한 나라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헌기록이 존재한다고 그 기록이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문헌기록 자체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그 문헌기록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헌기록에 나타나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확인할 수 있는 물적 증거들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3번과 같은 경우는 그 물적 증거가 거의 없다.

혹자는 평양지역에서 발견되는 기원전 시기의 고고학적인 유물이 고조선(王儉朝鮮)의 것이라고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 유물은 위에 보인 ①과 ②의 명제를 뒷받침하는 유물일 뿐이다. 문헌기록에는 고조선(王儉朝鮮)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알아보자.

『三國遺事』 「古朝蘇」조 원문/////

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 樂浪, 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

고조선(王儉朝鮮)에 관한 최고의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고조선(王儉朝鮮)에 대하여 4개의 문헌을 인용하여 기록을 하였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魏書』, 『古記』, 『唐裵矩傳』의 기사를 차례로 인용하는 형식으로 기록을 한 후, 마지막에 ‘『通典』 또한 이것과 같더라.’는 내용을 덧붙여놓았다. 이 『三國遺事』 「古朝蘇(王儉朝鮮)」조의 인용문 가운데 현재 확인이 가능한 것은 먼저 『唐裵矩傳』으로 이는 현존하는 『구당서』 『신당서』에서 확인 가능하며, 『통전』 또한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通典亦同此說’에 대한 주석으로 『漢書』가 등장한다.

이 『三國遺事』 「古朝蘇(王儉朝鮮)」조의 본문을 구성하는 4개의 기록 중 실질적으로 壇君王儉에 대한 기록은 『魏書』와 『古記』이다. 이 두 기록을 제외한 『唐裵矩傳』이나 『通典』에서는 壇君과 관련된 그 어떤 역사적 사실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三國遺事』 「古朝蘇」조를 구성하는 『魏書』와 『古記』의 기록에서 역사적 사실이 부정되는 근거가 증명된다면 고조선(王儉朝鮮)의 존재기반은 무너져 버리게 된다. 이는 고조선(王儉朝鮮)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느 순간 위조되어 만들어진 가상의 국가라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먼저 『古記』의 기록을 살펴보자.
『古記』의 기록은 전체적인 기록의 전개구조가 壇君에 맞춰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천상을 다스리는 桓因이 지상세계를 다스리고자 하는 庶子 桓雄의 뜻을 헤아려 그를 太伯山頂 神壇樹下로 내려 보냈고, 그 곳에서 桓雄은 곰에서 化한 熊女와 관계하여 壇君을 낳았는데, 그가 唐高卽位 50년에 平壤城에서 朝鮮을 건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린 지 1500年에 周虎王이 箕子를 朝鮮에 봉하니 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다시 阿斯達에 돌아와 山神이 되니 이 때 나이가 1908歲라는 것이다.

자!! 『古記』의 기록에서 역사적 사건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연구자에 따라서 단군 관련 『古記』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을 신화로 가탁하여 기록한 것이라 파악하고 역사적 사실을 유추하려고 하지만, 아무리 양보를 하더라도 壇君이 나이 1908歲까지 살면서 결국 神仙이 되었다는 것은 『古記』의 기록이 역사의 영역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화의 영역임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일연이 언급한 『古記』를 하나 더 살펴보자.

『三國遺事』 「北扶餘」조 원문/////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見下.]
/////

위 『三國遺事』 「北扶餘」조를 보면 天帝가 五龍車를 타고 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에 내려온 후 北扶餘를 건국하여 왕이 된 후 그는 스스로 이름을 解慕漱라 칭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연은 이 『古記』의 기록에 보이는 壇君과 解慕漱를 동일인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三國遺事』 「北扶餘」조에서 解慕漱에 대하여 남긴 주석이 그 증거이다. 즉 夫婁와 朱蒙이 異母兄弟가 되기 위해서는 壇君과 解慕漱가 동일인일 수 밖에 없다.

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 今按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고구려인들 스스로가 남긴 기록이나 중국 측이 남긴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시조는 鄒牟(朱蒙)왕이다. 그리고 鄒牟(朱蒙)왕의 아비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고려인들이 『古記』를 작성하면서 그 전의 기록에 보이지 않던 鄒牟(朱蒙)왕의 아비인 解慕漱가 등장한다. 이것은 그 이전부터 鄒牟(朱蒙)왕의 아비에 대한 기록이 존재했다기보다는 고려인들에 의하여 鄒牟(朱蒙)왕의 아비가 창출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판단이다.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를 통하여 두 부분에 분리되어 기록되어 있는 『古記』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나이가 1908歲에 신선이 된 壇君은 前漢 宣帝 神爵三年 壬戌 四月 八日에 다시 인간세상으로 내려와서 北扶餘를 건설하고 아들 朱蒙을 낳는다. 이 朱蒙이 고구려의 건국시조이다. 결국 『三國遺事』 「古朝蘇(王儉朝鮮)」조와 「北扶餘」조에 보이는 두 『古記』의 기록은 고구려의 건국시조 鄒牟(朱蒙)왕에게 신화를 이용하여 신이성을 부여한 기록인 것이다. 그래서 『古記』에 보이는 古朝蘇(王儉朝鮮)은 고려인들이 鄒牟(朱蒙)왕을 위하여 만들어 낸 가상의 위조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고조선(王儉朝鮮)을 폐기 처분하자.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 747474. 9089
































잡담 :
『三國遺事』에 따르는 한 古朝蘇은 衛滿朝鮮보다 앞 시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위만조선 이후의 대동강 유역에 대한 정치체나 국가를 언급할 때 古朝蘇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잘 못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우리 민족의 역사인가?’에 대하여는,....



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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