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書紀』 「신공기」의 기년조작과 『廣開土王陵碑文』에 보이는 倭
<이전 생략>,.... 계속하여 신공 65년의 기록을 보자
六十五年。百濟枕流王薨。王子阿花年少。叔父辰斯奪立爲王。
신공65年은 서기 265년이며, ‘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은 서기 385년의 사건이다. 『日本書紀』 자체의 기년과 기사의 내용이 정확히 120년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서기 265년과 서기 385년은 太歲干支가 일치한다. 『日本書紀』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신공 65년조를 위하여 『日本書紀』 작성자들은 55년, 56년, 64년의 기록을 추가하여 기년에 맞지 않는 백제왕력을 삽입한 것이다.
『日本書紀』의 기록자들은 3세기에 활동한 卑彌呼를 4세기 후반의 인물인 應神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母子관계로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母子관계가 아니다. 이것이 『日本書紀』가 숨겨온 기년의 비밀이다.
이제 이 엉터리 기록 3개(55년, 56년, 64년)를 『日本書紀』에서 삭제하자. 그러면 『日本書紀』 「신공기」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5년조 기록에 이어서 계속하여 66년조 기록도 살펴보자.
六十六年。是年晋武帝泰初二年。晉起居注云。武帝泰初二年十月。倭女王遣重貢獻。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제 『日本書紀』의 기록자들의 고민이 보일 것이다. 『日本書紀』의 기록자들은 『晉書』에 기록된 壹與의 기록을 「위지」 「동이전」 「왜인전」의 비미호의 기년과 충돌하지 않도록 『日本書紀』에 기록을 하려고 하였을 것이며 그 절충점이 바로 ‘泰初’라는 연호인 것이다. 신공 65년이 385년이라면 신공 66년은 386년이 되고, 그렇다면 『晉書』에 기록되어 있는 壹與의 기록을 삽입할 공간이 사라진다. 그래서 晋武帝泰始를 晋武帝泰初로 바꿈으로써 『日本書紀』의 기록자들은 快哉를 불렀을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日本書紀』를 읽는 독자들에게 ‘泰初’를 ‘泰始’의 잘못으로 유도한 것이다. 기막힌 꼼수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日本書紀』 「신공기」에 숨어 있었던 기년의 비밀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앞서 필자는 『日本書紀』 「신공기」의 백제왕력으로 도배되어 있는 후반부 기사는 4세기 후반의 시간 정보를 가지고 있는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공66년은 서기 266년으로 서기 386년과 太歲干支가 같다. 그렇다면 『日本書紀』에 기록된 泰初二年은 서기로 몇 년일까? 중국 역사에서 泰初라는 연호를 쓴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그 중 『日本書紀』의 기록과 가장 가까운 시기는 前秦의 泰初二年으로 서기 387년이다. 신공66년과 泰初二年은 1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日本書紀』 작성자들은 晋武帝泰始(서기 266년)를 泰初로 바꾸었지만 太歲干支에서 나타나는 1년의 차이를 도저히 보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위지」 「동이전」 「왜인전」에 기록된 ‘景初二年’ 기록을 『日本書紀』에 옮겨 적으면서 ‘景初三年’으로 바꾸었고 또, 『晉書』에 기록된 ‘泰始二年 十一月己卯,倭人來獻方物’도 「晉起居注」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기록하면서 ‘武帝泰初二年十月。倭女王遣重貢獻’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 또한 1월의 차이를 발생시켜 기년 조작을 알린 것으로 파악된다.
『日本書紀』 「신공기」의 전반부 기록은 3세기대의 일본열도에 실질적으로 존재했던 여왕인 卑彌呼의 기년으로 연대기를 작성되어 있다. 그러나 『晉書』에 기록된 壹與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卑彌呼의 기년을 늘였지만 그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장치로써 ‘泰初2년’이라는 기록을 남겨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卑彌呼의 기년을 늘여 應神에 연결시켜 버렸다.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日本書紀』의 기년 조작은 일본열도의 일부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卑彌呼와 壹與 이후 약 120년가량 일본열도에는 無王統의 공백기가 있었음을 숨기기 위한 조치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廣開土王陵碑文』에 보이는 ‘倭’라는 실체는 『日本書紀』에서 찾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 복원된 『日本書紀』의 기년은 중국 측 정사 기록과도 호응한다. 즉 「위지」 「동이전」 「왜인전」과 『晉書』의 기록에 보이는 卑彌呼와 그녀의 宗女인 壹與를 마지막으로 倭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후대의 기록인 『송서』, 『양서』 등에 왜오왕이 등장할 때까지의 공백과 거의 일치한다. 즉 중국정사의 기록과 『日本書紀』의 기록은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까지 일본열대에는 무왕통의 공백기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廣開土王陵碑文』을 살펴보자. 기록을 보면 倭라는 글자가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羅 以爲臣民
신묘년은 서기 390년이다. 근데 이 시기 중국정사와 『日本書紀』의 기록에 보이지 않던 倭가 『廣開土王陵碑文』에는 기록되어 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일까?
앞서 필자는 『日本書紀』 「신공기」에서 신공64년조의 기록은 a)百濟國貴須王薨。과 b)王子枕流王立爲王。으로 분리되면서 120년간의 공백을 가지는 두 개의 기록으로 나뉘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日本書紀』가 가지고 있는 기년의 비밀은 끝이 아니다. 이제 『日本書紀』 「신공기」에서 「위지」 「동이전」 「왜인전」과 중간 중간 나열된 백제 왕력, 그리고 「晉起居注」를 지워버리고 『日本書紀』를 다시 보자. 아마 숨막히는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차차 그 속으로 빠져 들어보자.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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