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신라 및 고구려 왕력복원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관련기록을 보면 왜의 동북쪽 1천 리에 위치한 多婆那國 출신으로 되어 있다. 그 곳에서 왕비가 임신한 이래로 7년 만에 알(卵)로 태어났는데, 왕이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리라’하여,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로 떠내려 보니, 금관가야의 바닷가에 닿았다가, 진한의 阿珍浦口에 이르렀다. 이때를 삼국사기는 박혁거세거서간의 즉위 39년(기원전 19년)이라 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이러한 모순들이 모여 연구자들 사이에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불신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것이 있다. 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거쳐 진한의 阿珍浦 어구에 왔다는 것이다.
다시 가락국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가락국기를 보면 탈해는 수로왕과 도술을 이용하여 다툰다. 두 사람이 다투었다면 두 사람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필자가 복원한 수로왕의 재위기간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하여 17년임을 밝혔다. 그리고 그 즉위년은 92년이나 93년 쯤이 된다. 그리고 탈해왕이 62세에 재위에 올랐으니, 수로왕 죽위 1년을 탈해왕의 1살로 가정하면 153년이나 154년이 된다.
자!! 신라본기에서 153년이나 154년을 찾아보자. 아달라왕이 즉위한 해가 신라본기에는 서기 154년이다. 바로 아달라왕은 朴씨 성을 가진 마지막 왕인데, 그 아달라왕의 연대기는 아달라왕의 연대기가 아니고, 바로 탈해왕의 연대기이다.
논리전개를 위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필자가 만든 이야기 1- 한 전투부대가 행군 중 너무나 더웠기에, 가는 길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에서 목욕을 하게 되었다. 목욕을 하려면 전투복 상의, 하의를 벗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1소대 부대원들은 소대장의 전투복 상의, 하의를 기준으로 나란히 일렬로 정렬을 해두소 시원하게 목욕을 하였다. 근데 이 때 말년 병장의 장난 끼가 발동하였다. 그래서 전투복 하의는 가만히 두고 전투복 상의의 순서를 몇 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병사들은 자신이 벗어 놓은 곳에 가서 그 자리에 있는 전투복을 착용하니 옷이 맞지 않은 부대원들이 나타났다. 그제서야 병사들은 말년 병장의 장난임을 알아차렸다.///miri
필자가 꾸며서 만든 이야기에서 상의와 하의는 각 왕들의 ‘즉위 기록’과 ‘연대기’라고 보면 된다. 바로 삼국사기는 즉위기록을 변경시킨 기록임을 알아야한다.
삼국사기를 펼쳐보자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勿王{奈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照知&王{麻立干}>之再從弟也. 母, <金>氏<鳥生>夫人, <訥祗王>之女; 妃, <朴>氏<延帝>夫人, <登欣>伊湌女. 王體鴻大, 瞻{膽}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曰『左』․『漢』, <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菟”․<匈奴>語“撑犁孤塗”等. 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
지증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생략> 論曰 : 신라의 왕 가운데 거서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1이며, 차차웅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1, 이사금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16, 마립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4이다. 신라 말년의 명유 최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에서는 이들을 모두 왕이라고 불렀고, 거서간 등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 용어가 천박하여 부를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길 것인가? <이하 생략>
智證麻立干의 기록에 新羅王稱에 대하여 ‘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麻立干에 대하여 訥祗麻立干조에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 謂橛也. 橛謂諴操{標}, 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김대문은 麻立을 말뚝(橛 이라고 하고 있다. 이제 필자가 그 말뚝을 몇 개 먼저 박아놓는다. 麻立干이 4개라고 하였으니, 박아야할 말뚝도 4개이다.
앞서 필자는 탈해왕의 합당한 재위기간은 삼국사기의 연대기로 보아 아달라왕 시기라는 말을 하였다.
그럼 말뚝을 박아보자.
혁거세(1, 서기전57~서기5)) ------- 탈해(8, 서기154~184) ------- 미추(16, 서기310~356) ------- 지도로(22)
혁거세는 朴씨 왕조의 시작이며, 탈해는 昔씨 왕조를 시작한 시조이다. 그리고 탈해왕의 말뚝이 朴씨왕의 마지막 자리에 놓이듯이 金씨왕조의 시조인 미추 또한 昔씨 왕조의 마지막 자리에 놓여야 한다. 그리고 지도로가 4번째로 놓이는데, 그는 미추를 시조로 하는 金씨 왕조의 중흥시조이다.
삼국사기는 尼師今은 16명이 있다고 했다. 바로 혁거세로부터 미추에 이르는 16명의 왕을 이으(이사, 尼師)라는 말이다. // 줄을 이으라 = 줄을 이사(尼師))라
그래서 그 차례를 보면 아래와 같다.
1.혁거세---2.남해---3.유리---4.파사---5.지마---6.일성---7.아달라---8.탈해---9.벌휴---10.내해---11.조분---12.첨해---13.유례---14.기림---15.흘해---16.미추---17.내물---18.실성---19.눌지---20.자비---21.소지---22.지증왕
이제 말년 병장이 장난쳐 놓은 상의가 제대로 찾아졌다.
7대 아달라왕을 마지막으로 朴씨신라는 막을 내린다.(miri주 : 아마 탈해가 알로 있었던 7년은 朴씨 신라의 7명의 왕에 대응하는 기록으로 보인다.) 그리고 8대 탈해가 昔씨신라를 새롭게 개창한다. 62세의 고령에 왕위에 오른 탈해가 30년을 재위하다 보니, 탈해의 이어 아들 구추각간이 먼저 죽었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들이 아닌 손자 벌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昔씨신라는 15대 흘해를 마지막으로 미추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이제 金씨가 신라의 주인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마립간을 넷(4)이라 하였는데, 삼국유사는 마립간을 다섯(5)이라 하였다. 삼국사기가 가르쳐주지 않은 말뚝 하나를 삼국유사는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만든 이야기 2- 2소대도 행군 중 목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디에 가든지 고문관(?)이라 불리는 사람이 하나씩 있다. 1소대에 장난 끼 많은 말년병장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2소대에는 김아무개 고문관이 있었는데, 그 고문관은 말년 병장의 전투복 위에 자신의 전투복 상,하의 올려놓은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전투복을 입으려고 하니 하나가 모자라는 것이다. 자세히 봐야 숨어 있는 하나가 보이는 것이다.///miri
고구려본기에 삼국지가 말한 消奴部와 桂婁部의 왕권교체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것이 바로 태조왕의 기록을 2등분하면 하면 보이게 된다.(필자의 예전 글을 찾아보면 정리해 두었다.) 분리된 태조왕의 앞부분에 있는 기록이 주몽을 시조로 하는 解씨고구려의 마지막 왕들의 기록이고 분리된 뒷부분이 바로 高를 성으로 사용한 高씨고구려의 시조인 태조왕의 기록인 것이다. 고구려본기는 高씨고구려의 시조를 숨겨놓은 것이다. 삼국유사는 새로운 말뚝하나를 박아놓고 그 桂婁部의의 첫 시조 왕을 알려준 것이다. 삼국사기가 桂婁部의 첫 왕을 숨긴 이유는 광개토대왕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 이전에 고구려는 자신들 선조의 왕계를 정리한 것으로 보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왕계가 변형되어 있는 것을 麻立干의 개수로써 폭로한 것이다.
이제 고구려왕들을 이름을 하나씩 앞으로 당기면, 桂婁部왕들의 이름과 시호가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천왕이 바로 宮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 郊彘(교체)라는 단어 하나를 넣어 두었다. 동천왕의 이름이 교체가 아니고, 앞에 있는 왕들의 이름을 교체하라는 것이었다.
제가 삼국사기를 상대로 장기를 두면서 숨겨진 宮을 찾아 “장군”을 불렀습니다. 삼국사기가 호락호락 승부를 인정할까요?
제 이야기가 재미있으세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1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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