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화랑세기와 음란의 기준,..

livemiri 2010. 11. 15. 14:39
livemiri (2010-11-15 14:33:41)
□□□□님의 질문을 제 나름대로 3단락으로 나눴습니다. 하나하나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 曰
음란소설이라는 기준은 무언가요?
귀족의 생산 라인은 복잡한 게 사실 아니던가요?
있는 그대로 적는다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역사 또한 음란소설이 되겠지요?

그런데 저는 화랑세기를 읽으며
어떤 성적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것도 음란소설이라는 말 한마디로 사그리 묻어버릴 수 있겠는지요

livemiri의 답변
사실 ‘음란’의 기준을 말한다면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한번 씩 어떤 문화현상이나 문화작품에 대하여 외설(포르노)이니 예술이니 하면서 찬반논란이 있었던 적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의 글은 “화랑세기에 음란한 기록이 있다고 소설이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간에 알려져 있는 ‘화랑세기’라는 문건을 기존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비교를 해보고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고, 그래서 박창화의 소설작품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또, 그 소설을 들여다보니 음란한 내용이 좀 들어 있어 저 나름대로 음란소설이라 언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음란소설이라는 말 한마디로 사그리 묻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화랑세기에 음란한 기록이 존재한다고 음란소설이라 주장한 것 또한 아니라는 것입니다.



□□□□님 曰
미리님이 제시한 다른 역사기록처럼
김대문이 적은 화랑세기라면 있을 수 없는 오류를
더 찾아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성에 대한 적나라함에서 비롯된 인상비평은
기록에 대한 적절한 평가 방법은 아닐 듯합니다.

livemiri의 답변
세간에 알려져 있는 ‘화랑세기’라는 문건이 김대문의 기록을 필사한 것인가? 아니면 박창화의 소설적 구성이고 상상인가를 객관적으로 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검정의 방법으로 제가 택한 것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과 비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 글에서 제가 언급하였듯이 저의 글의 2년 전에 작성했던 글의 연장입니다. 그리고 기본 골격은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2년 전의 글에 다 적지 못했던 부분을 지금 더 보충하였을 따름입니다.

저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통하여 알아본 화랑이나 국선에 관한 기록이 “세간에 알려져 있는 ‘화랑세기’와는 첫단추부터 삐걱거려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최초의 국선 설원랑과 또, 미시랑에 대한 기록이 세간에 알려져 있는 ‘화랑세기’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박창화 發 화랑세기]에는 7세 풍월주로 설화랑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처음 이름을 薛原郞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그는 建元 14년(서기 549년)에 나서 建福 23년(서기 606년) 7월에 卒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따로 독립된 글을 올리겠습니다.


본문 글에 제가 “어떤”과 “모든”이라는 말을 분명히 언급해 놓았습니다.
“김대문이 적은 화랑세기라면”이라는 가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그 예전 김대문이 작성했을 [화랑세기]의 기록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녹아 있는 기록을 통하여 [박창화 發 화랑세기]의 진위를 판단해 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제가 판단을 해보니 “세간에 알려져 있는 ‘화랑세기는 단지 박창화의 소설이더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님 曰
저는 제 책에서 마립간에 대한 김대문의 해석을
민간어원이라고 했습니다만
김대문 세계관의 지식이 모두 옳았을까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livemiri의 답변
저는 마립간을 민간어원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사금이니 마립간이니 하는 표현은 얽히고설킨 신라왕력의 실타래를 푸는 암호문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예전 저의 의견을 피력해 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