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갑툭튀`한 화랑세기 //보충

livemiri 2010. 11. 15. 18:05
livemiri (2010-11-15 15:55:58)
지금 연구자들이 보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출판과 그 것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과정이 아주 투명합니다. 그런데,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에서 필사했다고 알려진 “화랑세기”는 “갑툭튀”한 책이라는 것이죠.

환단고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놈도 “갑툭튀”한 책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진위를 따져보는 것이죠.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말씀하셨는데, “제가 설명한 논리로 일본서기가 음란소설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일본서기 또한 출판과 그 것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과정이 아주 투명한 서적입니다.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을 수 있니, 아니면 믿을 바가 못되니, 역사를 조작한 기록이니, 아니니 논쟁이 많은데, 저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숨겨놓은 기년을 바로 잡으면 버려질 기록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취지로 복원한 기년을 통하여 저의 주장을 해놓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화랑세기를 음란소설이라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이라고 제 글 속에서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1. 화랑세기라는 책이 세간에 “갑툭튀”했다.
2. 그 내용을 기존에 존재하는 알려진 과정이 투명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내용과 비교해 보았다.
3. 그랬더니 “갑툭튀”한 화랑세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차이가 많이 나고, 소설 구상을 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었다.(풍월주들의 제위와 관련하여)
4. 그래서 박창화가 작성한 소설로 파악한다.
5. 소설의 내용을 보니 음란한 내용이 제법 있었다. 그래서 음란소설로 본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제가 최근에 본 논문 한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혹시 이미 보셨거나, 학회토론장에 가셔서 익히 알고 계산다면 죄송하고요,...

한국고대사탐구학회
http://sehistory.sogang.ac.kr/sobis/community/board/pdsList.do?boaBean.boaSeq=000000000279#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학술대회 발표문...( 0 ) 담당자 2010-11-07 31


livemiri (2010-11-15 17:54:19)
삼국사기에 마립간이라는 기록이 보이는 시기에 금석문에서는 매금[寐錦] 또는 寐錦王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서기 또한 寐錦이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그러니 삼국사기의 기록이 잘못되었던지, 아니면 삼국사기가 의도적으로 寐錦 대신에 마립간이라고 표현했다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김대문은 성덕왕 3년(서기 704년)에 한산주도독에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최치원인데 그는 문성왕 19년(서기 857년)에 태어났으며 서기 경문왕 8년(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길에 올랐고,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하였어요. 그리고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은 서기 879년 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작성한 것입니다.

위 글을 보면 김대문과 최치원은 동시대의 인물은 아닙니다. 김대문이 몇 세대는 앞입니다. 그런데 최치원이 작성한 글 중에 사산비명이 있는데, 그 중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寐錦之尊”이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이는 “최치원 당대에 신라의 왕호인 寐錦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최치원은 [제왕연대력]을 작성하면서 寐錦王이라는 기록을 삭제하고 그 곳에 왕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그 보다 앞전 시기의 “김대문이 寐錦이라는 신라왕호를 몰랐을까?”하는 의문은 저절로 듭니다.

그리고 김대문의 시기에도 분명히 “寐錦이라는 신라왕호”가 남아 있었을 터인데 삼국사기는 왜 ‘마립간’이라는 이상한 왕호를 김대문의 말을 빌어 말뚝이라 했을까?

저는 이 점을 삼국사기나 삼국사기의 저본이 된 기록들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합니다. 그 당시 목록이 보이는 ‘삼국사’ ‘국사’ ‘고기’ 등의 기록에서 벌써 신라의 왕호나 왕력에 대한 변형이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제 추측으로 고려 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대문과 마립간에 관련된 표현인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標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등 김대문의 이름을 빌려 표현한 구절들은 “신라왕력에 대한 변형”이 끝난 후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같이 서술한 것이 아닌가?”추측하고 있습니다.


위 인용문에 보이는 것처럼, 만약 김대문이 살아있을 당시에 마립간이라는 왕호가 있었다면, 그가 저술한 화랑세기에도 마립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해야 할 것입니다.



livemiri (2010-11-15 17:59:04)
진흙 속에 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백제 목간은 그 것이 언제 만들어 졌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많은 근거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위시한 후대의 많은 역사 기록을 통하여 목간이 나온 땅에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지를 판단하고 그리고, 그 목간이 “갑툭튀”한 지역의 흙속에 파묻혀 잇는 문화층을 관찰하여 여러 가지 증거를 모아서 합리적으로 판단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이것은 어느 시대 물건이구나.”라고 하는 것이고요.

저의 주장도 “화랑세기란 놈이 근 천년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갑툭튀했으니” 이것이 김대문의 저술인지, 아니면 그냥 박창화의 소설인지를 여러 증거를 모아 판단을 해봐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저 나름대로 판단한 바로는 박창화의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륵사 서탑 봉안기를 통하여 저도 삼국유사의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탑 봉안기의 발견을 통하여 삼국유사 또는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근래에 조작되었다고는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가 저술된 명확한 시기와 그 것이 전해진 과정이 투명하니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의 기록이 조작된 기록이라면 그 것은 삼국유사가 저술된 시기라는 것이죠.

일본서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서기의 기년이 조작되었다면, 그 것은 일본서기가 처음 저술된 시기라는 것이죠. 처음에는 기년의 조작이 없는 일본서기가 있었는데 후세의 사람이 필사하는 과정에서 기년을 조작했거나, 아니면 일본서기의 원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기록자가 자신의 상상으로 일본서기의 기년을 조작했다면 이것은 다른 문제죠.
삼국사기의 왕력 또한 마찬가지고요.


박창화는 화랑세기를 필사했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연구자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검증방법을 통하여 이것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 나름의 방법으로 “갑툭튀”한 화랑세기를 검증해 보니 박창화의 소설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저는 박창화 관련 문건에서 역사 연구를 위한 자료는 하나도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livemiri (2010-11-15 19:28:47)
제가 무엇을 피해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일을 잠시 미루고 성심성의껏 질문에 답변을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ㅠ,ㅠ

그리고 저는 麻立干을 寐錦과 일치시킨 적이 없습니다.

저의 이제까지 주장은 최초로 매금이 보이는 광개토대왕비문으로부터 신라인들의 금석문에 이르기까지 신라왕의 호칭은 ‘寐錦, 또는 寐錦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그 자리에 이사금이나 마립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삼국사기의 저본이 된 기록에서 ‘寐錦, 또는 寐錦王’이라는 호칭을 어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바꿔 놓은 것이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왕을 부르던 호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저의 주장은 “寐錦王=이사금, 寐錦王=마립간”처럼 동일하거나 동등한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를 miri의 남편이라고 하면 즉 “나(livemiri)=miri의 남편”인데, 이러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를 읽을 때, ‘이사금이니 마립간이니 하는 것을 왕으로 고쳐 읽으면 된다.’라고 주장한 것이며, 또, 이사금이나 마립간이라는 표현은 암호문인데 그 것을 제대로 해독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왕력이 올바르게 복원된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었어요.


삼국사기의 기록입니다.
○<訥祗>麻立干立,[<金大問>云: “麻立者, 方言, 謂橛也. 橛謂諴操{標}󰄲, 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奈勿王>子也. 母, <保反>夫人[一云<內禮吉怖>], <味鄒王>女也; 妃, <實聖王>之女.

이번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입니다.
第二南解王 ,..... 或曰麻立干.[立一作袖.]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標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위 기록에서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입니다. 이것은 또,(一作) “金大問云. 麻袖者, 方言謂橛也”입니다.

‘麻立者’가 따로 이고, ‘麻袖者’가 따로 파악되어 두 개의 별개를 기록한 것이라 여겨지지 않습니다. ‘麻立者’든 ‘麻袖者’든 어느 것이든 간에 “方言謂橛也‘라는 것입니다. 만약 두 개가 다른 표현이었다면 두 개의 주석이 있어야 합당합니다. 잘 보시면 삼국사기에는 ‘麻袖者’가 보이지 않잖아요.

즉 ‘麻立者’든 ‘麻袖者’든 신라왕들의 왕력을 복원하는 말뚝(橛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이었어요. 그 말뚝을 세우는 방법은 제가 예전에 설명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