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박창화 發 화랑세기]의 風月主
livemiri
2010. 11. 18. 03:45
[박창화 發 화랑세기]의 風月主
[박창화 發 화랑세기]에는 ‘풍월주’가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풍월주란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문헌 기록을 찾아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인데, 그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1권 慶尙道 慶州府 【풍속】風月主ㆍ花郞 //인용 시작 법흥왕(法興王) 원년(元年)에 동남(童男)으로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라 부르며, 착한 선비를 구하여 무리를 만들어 효(孝)ㆍ제(悌)ㆍ충(忠)ㆍ신(信)을 장려하였다. ○ 처음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인재를 알 수 없음을 근심하고, 무리를 지어 모여 놀게 하여 그들의 행의(行義)를 살펴본 뒤에 등용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아름다운 여자 두 사람을 뽑아서 원화(源花)를 삼았으니, 이름은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인데, 모인 무리가 3백여 명이었다. 두 여자는 미모를 서로 다투어 질투하였다. 준정이 자신의 집에 술을 준비하고 남모에게 억지로 권하여 취하자 물에 던져 죽였다. 남모의 무리들이 그 시체를 찾아가지고 고발하여 준정은 사형을 받았다. 드디어 원화(源花)의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단장시켜서 화랑(花郞)이라 칭하니, 많은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권면(勸勉)하고, 혹은 노래와 풍악으로 서로 즐기면서 산과 물의 경치를 찾아다니며 노닐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알게 되어 가려서 등용하였다. //이상 인용 끝 출처 : 한국고전번역 DB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seojiId=kc_mk_g012%26bizName=MK%26gunchaId=av021%26muncheId=01%26finId=002
위 출처에 소개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慶尙道 慶州府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면 典據가 되는 문헌을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만 읽어봐도 三國史記, 唐書, 隋書 등의 관련 기록을 밝히고 추가적인 설명을 가하고 있다.
그런데 【풍속】 관련기록에서 사금갑 관련 부분이나 유리왕대의 嘉俳 관련 기록도 典據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 글을 읽어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또 風月主ㆍ花郞 관련기록도 典據를 밝히지 않았지만, 법흥왕 원년의 風月主 관련 기록을 제외하면 삼국사기(진흥왕37년)나 삼국유사(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지 않는 기록으로 【풍속】風月主ㆍ花郞에 기록되어 있는 ‘법흥왕 원년에 風月主를 설치했다’는 기사는 무엇을 근거로 기록한 것일까?
일부의 연구자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이외에 풍월주의 기록을 담고 있던 문헌이 있어 그 것을 통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최초로 화랑과 국선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후 긴 공백기 다음에 나타나는 ‘풍월주’란 용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저자들에 의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용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원화와 화랑제도는 분명히 眞興王代에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彌勒仙花 未尸郎, 眞慈師조의 전반부는 “第二十四眞興王”으로 문장이 시작하니시간적 배경은 眞興王代임이 분명하다. 그 기록을 보면 “(진흥)왕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러니 풍월도를 처음으로 만든 왕은 진흥왕이라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風月道를 삼국사기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와 비슷한 것은 발견되는데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 기사에서 그들의 행적을 “或相磨爾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화랑에 대한 기록 이후에 3가지 근거를 추가하여 화랑 관련 기록을 보충해 놓았는데, 그 하나가 김대문의 화랑세기이고, 2번째는 최치원의 鸞郞碑 序이며, 마지막이 唐 令狐澄의 新羅國記이다.
이 중 최치원의 鸞郞碑 序를 보면 그 곳에 “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風月道”와 같은 의미로 파악되어진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風流(道) 또는 風月道 관련 기록은 아무리 상한을 올려 잡는다고 하더라도 진흥왕 이전으로 소급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風月主는 風流(道)나 風月道 무리들의 우두머리란 의미로 파악되는데, 삼국사기의 風流(道) 또는 삼국유사의 風月道라는 것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조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앞선 문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하여 법흥왕대에 풍월주를 설치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법흥왕’이 ‘진흥왕’의 誤記이거나, 아니면 저자들이 화랑제도의 시행(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 37년) 이전에 보이는 사다함(열전 사다함전) 등을 통하여 진흥왕 37년 이전에도 화랑이 존재하였음을 인지하고 그 상한을 법흥왕대로 소급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한다.
한편 이 풍월주란 용어는 비슷한 시기의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그리고 이보다 후대의 문헌인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풍월주가 후대 기록의 출처로 보여 더 이상의 비판은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필자의 주장은 풍월주란 용어는 15세기 말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용어라고 판단한다. 필자에 앞서 필자와 비슷한 사고를 한 연구자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예전 기사를 밑에 첨부합니다. 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11/021015000200711150685054.html
이처럼 15세기에 처음 만들어진 風月主라는 표현이 김대문이 기록했다는 화랑세기에 나타난다면 그 것은 후대의 위작이겠지요. 그러나 박창화가 자신은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필자는 [박창화 發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소설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ver. 0. 00000. 1027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잡담 : 오늘이 대수능일이네요. 모든 수험생들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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