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建康實錄에 기록된 백제의 위치
livemiri
2011. 1. 5. 15:34
建康實錄에 기록된 백제의 위치
중국의 정사 기록 중 최초로 백제전이 독립하여 記載되어 있는 사서는 송서이다. 송서는 중국 南朝 宋의 正史로써 송나라 60년간의 역사가 總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송서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전을 살펴보면 原流, 요서영유, 대중관계, 왕계記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原流記事에서 백제의 위치를 고구려를 기준으로 막연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 宋書卷97-列傳第57-百濟國
그 다음으로 백제전이 독립되어 있는 중국의 정사 기록은 남제서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이 현존하는 南齊書 동남이열전의 기록은 고구려전의 후반부 일부와 그 뒤 연결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전의 전반부에 缺文이 있다. 보통 연구자들 사이에는 판본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총 320~4자정도가 결락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결락된 부분에 原流記事, 요서영유記事 등이 기록되어 있었으리라 추측되지만 정확한 실상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앞서 기록된 송서와 비슷할 것이라고 추측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 남제서의 缺文을 보완할 수 있는 기록으로 ‘建康實錄’의 기록과 ‘冊府元龜 卷963 外臣部 封冊조’의 기록이 있다.
//// 아래는 建康實錄의 기록
百濟弁辰之國 起晉世受蕃爵 自置百濟郡 在髙麗東北 齊建元二年 其王弁都使貢方物 永明二年魏虜征之大破百濟王弁都
//// 아래는 冊府元龜 卷963 外臣部 封冊
南齊太祖建元二年三月百濟王牟都遣使貢獻詔曰寶命惟新澤波絕域牟都世藩東表守職遐外可卽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 武帝永明八年正月百濟王牟太遣使上表遣謁者僕射孫副策命太龍亡祖父牟都爲百濟王曰於戱惟爾世襲忠勤誠著遐表海路肅澄要貢無替式循彛典用纂命往欽哉其敬膺休業可不愼歟詔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今以世襲祖父牟都爲百濟王卽位章綏等王銅虎竹符曰其拜受不亦休乎
冊府元龜는 백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建康實錄의 기록에는 “在髙麗東北”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고구려의 동북쪽에 있다.”
‘백제가 고구려의 동북쪽에 있다’고 한 이 기록은 기존 사서의 많은 기록과 호응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사서는 장수왕의 ‘7일7야’에 걸친 백제 왕성의 공격이 있기 전까지 백제는 한반도의 한강유역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장수왕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백제는 그리운 고향 땅 한강유역을 버리고, 한반도의 금강유역인 지금의 공주 땅으로 도망을 간다. 이때 후에 무령왕이 될 어린 나이의 ‘사마’도 전쟁에서의 엄청난 고통과 두려움을 온몸 가득 체험하였을 것이며 고향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힘겹게 피난길에 따라 나섰을 것이다.
하여튼 중국 대륙에 남제가 존속할 무렵 백제의 위치는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이다. 고구려를 기준으로 표현한다면 동북이 아니라 서남쪽이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建康實錄은 在髙麗東北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이 기록을 잘못된 기록으로 치부하거나, 建康實錄의 지리적 관념의 무지로 파악해 버린다. 그리고 더 이상의 역사 연구의 소재로 이용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문장의 끊어읽기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다시 보자.
起晉世受蕃爵 自置百濟郡 在髙麗東北 /////
위 기록의 ‘在髙麗東北’의 의미가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백제군의 위치가 고구려의 동북쪽에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建康實錄의 기록을 보면 髙麗國與魏虜接界라 하여 고구려와 魏가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百濟王弁都 또한 魏의 기병과 전쟁을 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니 백제의 위치가 고구려동북이 되어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사실은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에 백제가 있었으니 기병을 통한 전쟁은 막대한 수군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해보면 百濟王弁都과 魏와의 전쟁은 요하유역의 요서百濟郡에서 벌어진 사건이며, 在髙麗東北이라는 기록은 요서百濟郡의 위치를 설명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은 한강 유역의 위례성이나 금강유역의 웅진(공주)성의 위치를 설명한 표현은 더더욱 아니다.
즉 建康實錄의 ‘在髙麗東北’이라는 기록 한반도 서남쪽에 존속한 백제의 위치를 잘못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잘못된 기록이 建康實錄에 실려 있을까?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벌써 예전에 다 해놓았다. 필자는 예전 진서의 기록을 분석한 적이 있다. 그 때 裨離等十國 관련 기록에서 ‘臣芝’라는 꼬랑지를 달고 있는 者들이 한반도의 서남단에서 지금의 발해만 북단으로 옮겨가 새로운 삶을 개척한 마한인들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진서에는 마한전이 따로 입전되어 있지만, 많은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武帝太康元年’ 이하에 보이는 ‘其主頻遣使入貢方物’ 등의 기록이 晉대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 때 실질적으로 東夷校尉를 찾아가 歸化한 者들에 대한 기록은 裨離等十國의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다. 그 원문은 아래와 같다.
晉書卷97-列傳第67-裨離等十國 裨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領戶二萬.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領戶二萬.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 領戶五萬餘. 一羣國去莫汗又百五十日, 計去肅愼五萬餘里. 其風俗土壤並未詳. 泰始三年, 各遣小部獻其方物. 至太熙初, 復有牟奴國帥逸芝惟離, 模盧國帥沙支臣芝, 于離末利國帥加牟臣芝, 蒲都國帥因末, 繩余國帥馬路, 沙樓國帥釤加, 各遣正副使詣東夷校尉何龕歸化.
필자는 이러한 마한관련 기록이 두 개의 부분으로 분리되어 기록되어 있는 이유를 唐나라 때에 이르러 晉書를 새롭게 기록하면서 기존 역사 자료의 잘못된 분류로 나타난 현상이라 파악한다. 이러한 잘못된 분류를 따르는 진서의 기록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역사 연구자들 일부도 이 진서 裨離等十國에 보이는 牟奴國, 模盧國 등을 고구려나 숙신 등의 위치보다도 더 동북쪽으로 파악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建康實錄》 20卷을 저술한 唐나라의 許嵩도 여러 중국의 정사기록에 보이는 요서 백제군의 기록을 실질적으로 존재하였다고 인지하였으며, 그가 그 요서백제군을 구성하던 마한인들의 선거주지를 찾으면서 晉書의 裨離等十國에서 그 기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唐나라의 許嵩도 진서의 기록을 잘못 이해하여 고구려 동북쪽이라는 잘못된 기록을 남긴 것’으로 파악한다.
사실 요서백제군을 형성한 주요세력은 앞서 필자는 한반도 서남단의 마한인들이라는 주장을 수년 전에 하였다. 사실 이 요서백제군은 한강유역의 위례성에 도읍하였던 한성백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 한성백제가 고구려에 쫓겨 금강유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롭게 접촉하는 마한지역의 선주세력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에 의한 대규모 백제 공격과 그 이후 장수왕의 한성백제 침공은 실질적으로 한성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위만에게 패배한 준왕이 배를 타고 남한땅에 망명(?)을 했던 것처럼, 고구려의 침공에 살아남은 백제의 유이민들도 걷고 뛰면서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마한땅에 도망쳐 왔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한성백제의 모든 기억들을 지우고 금강유역과 그 남단에 선주해 있던 세력들과 결탁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 0077. 4222
잡담
저는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렇다고 종교관이 없는 것은 아니고요,... 산길을 걷다보면 목탁소리에 절에도 들어가 보고, 길거리를 걷다 종소리에 이끌려 교회나 성당에도 들어가 봅니다. 그런데 한 번씩 자신의 종교에 심취한 친구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어쩌다가는 대화가 전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그럴 때면 저는 적당한 이유로 자리를 피할 때가 있어요. ‘제가 늘 합리적인 시고를 가지고 생활한다.’는 아니지만,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합리적인 사고를 더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남은 하루 즐겁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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