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조연수묘지명(趙延壽墓誌銘)의 平壤之先仙人王儉
livemiri
2011. 1. 1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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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조연수”로 검색하면 탁본 판독문 해석문을 모두 볼수 있습니다. 이곳에 ‘평양의 선조는 仙人王儉’이라고 인식한 고려인의 기록이 있습니다. 아래에 일부분을 옮깁니다. 이전생략,...> 是年九月庚申將葬于天和山麓忠臣托予求誌辭不得已略銘之曰 平壤之先 仙人王儉 至今遺民 堂堂司空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 拜之藩宣 其系蟬聯 衰盾之日 公悉兩全 公壽何止 四十八年 嗟國之瘁 梁木其顚 身雖去歿 名豈沒焉 埋在此地 召在彼天 窀穸之夜 空爾冥然 誌以明德 輝光重泉 이하 생략,...> ///////////////// 올해 9월 경신일에 천화산(天和山) 기슭에 장례지내려 하면서, 충신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간략하게 명(銘)하여 이른다. 평양(平壤)의 선조는 선인(仙人) 왕검(王儉)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백성이 남아 있으니 당당한 사공(司空)이 그 분이시네. 평양의 군자는 삼한(三韓) 전부터 있으면서 수명이 천 년을 넘고 장수하여 신선이 되었도다. 변방의 중요한 신하[藩宣]가 되어 그 자손들이 연이어 관리가 되었는데 쇠락하여 은둔하는 시대에 공은 공명과 부귀를 모두 겸비하도다. 공의 수명이 어찌 48세에 그치는가, 아, 나라가 무너지고 대들보가 뒤집혀졌구나. 몸은 비록 죽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이 어찌 사라질 것인가, 이 곳에 묻혔으나 저 하늘로 불려가도다. 매장하던 밤 정신이 아득하고 앞이 캄캄하였으나 글을 적어 덕을 밝히니 중천(重泉)까지 환히 빛나리라. 출처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gsm.nricp.go.kr/_third/user/main.jsp ) 조연수묘지명(趙延壽墓誌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