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탈해왕의 연대기와 古本의 壬寅年
livemiri
2011. 2. 5. 18:56
탈해왕의 연대기와 古本의 壬寅年
삼국사기 脫解尼師今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脫解尼師今 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並寶物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 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櫝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韞櫝而出 宜名脫解" 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 以立功名" 於是 專精學問 兼知地理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年 登庸爲大輔 委以政事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 是以寡人先立 今也宜傳其位焉"
오늘 살펴볼 내용은 탈해왕의 연대기를 구성해 볼까한다.
위 즉위전기를 통하여 탈해왕의 연대기를 간단하게 구성해 보면 아래와 같다.
赫居世 39年(서기전 19년) 金官國海邊을 거쳐 辰韓阿珍浦口에 도착 南解王 5年(서기 8년) 남해왕의 사위가 됨 南解王 7年(서기 10년) 大輔에 올라 脫解王 元年(서기 58년) 나이 62세에 왕위에 오름
탈해가 나이 62세인 서기 58년에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은 그가 알로 태어난 후 父王에게 버림을 받게 되고, 배에 태워져 辰韓阿珍浦口에 도착한 서기전 19년과 비교하여 연대가 맞지 않는다. 辰韓阿珍浦口에 도착한 해를 나이 1살로 계산하더라도 脫解王 元年인 서기 58년은 77세의 나이로 15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러한 기록의 불일치는 연구자들에게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불신하는 근거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불일치는 삼국사기의 기년과 각 인물의 일대기를 복원하는 중요한 키라고 판단한다.
자!! 이번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昔脫解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第四脫解王 脫解齒叱今.[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禮卽位之初. 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有船來泊.
일연은 삼국유사에 석탈해가 駕洛國海中에 온 시기를 南解王時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당시 자신이 본 古本에서 壬寅年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같이 남겨놓았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하였다.
“古本에 이르길 壬寅년이라고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弩禮王의 즉위 초년보다 뒤의 일일 것이니 讓位를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또 먼저의 일이라면 赫居世王 때의 일일 것이다.그러니 이 일은 壬寅년이 아님을 알겠다.”
아마 일연은 古本에 보이는 壬寅年이라 것을 삼국사기의 기년에 新羅 4대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석탈해 관련 연대기와 60갑자를 맞춰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비교를 해보니 특정기록의 선후관계로 인하여 壬寅年이 될 수가 없으므로 古本이 틀렸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일연의 진담이었을까?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사소한(?) 기록으로 판단하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필자는 앞서 居西干,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 등의 칭호가 신라본기에 있는 신라왕력의 복원을 위한 암호문임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삼국사기는 이러한 칭호를 智證麻立干의 즉위전기기록에 사론으로 붙여놓았다. 그런데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은 2대 南解王의 기록으로 옮겨서 기록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암호문의 키를 먼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古本에 보이는 壬寅년 관련 기록도 같이 남겨놓았는데, 아마 일연이 은근슬쩍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것이 무엇일까?
예전 필자의 주장에 따라 석탈해왕의 재위기간을 서기 154년에서 184년까지로 수정해 보자. 이 수정된 기년을 이용하여 壬寅년을 찾아보면 서기 102년이 된다. 서기 154년이 석탈해가 62세로 왕위에 오른 甲午년이니 壬寅년은 52년 전으로 석탈해가 나이 10살에 金官國海邊을 거쳐 辰韓阿珍浦口에 도착한 해가 된다. 그리고 서기 184년은 석탈해의 나이가 92세가 되는 해로 이 때 붕어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석탈해를 뒤로 그의 아들 仇鄒角干이 아닌 손자 伐休가 왕위를 잇게 되는데, 필자는 이점을 석탈해가 장수를 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마 석탈해의 아들 仇鄒角干은 아비보다 먼저 사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그래서 손자 伐休가 자연스럽게 재위에 올랐을 것이다.
이제 석탈해가 新羅에 도착하기 전인 서기 102년 이전의 기록인 혁거세왕, 유리왕, 남해왕 등과 접촉한 기록은 버리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전하는 석탈해의 일생이 자연스럽게 파악이 된다.
석씨가 신라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석탈해가 신라에 온 서기 102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 008734. 0205
잡담 : 아직 설 연휴가 하루 더 남아 있네요. 벌써 일터로 돌아가셔서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다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설 연휴가 길다보니 생활에 여유가 조금 생기네여. 매년 설이 올해처럼 길었으면 좋겠네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