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탈해의 탄생년도
livemiri (2011-02-12 18:25:40)
□□□님 曰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고 있으며, 저도 또한 삼국사기 초기기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livemiri 曰
남이 걸금을 지고 장에 간다고 나 또한 장에 갈 때 걸금을 지고 갈 필요는 없습니다. 학계에서 삼국사기 기록을 부정하는 것과 합리적으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년을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님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신다면 그 근거를 주장하시면 됩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토론을 통하여 결론을 얻는 경우가 몇 가지가 있더라구요.
하나는 (이해 집단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토론하여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경우
또, 하나는 // 토론하여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는 경우
다음 하나는 // 서로 토론하여 진실을 땅에 묻어버리는 경우
...
...
등등
저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토론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토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님 曰
그런데 선생님께서 잘못된 기년으로 탈해의 연대기를 추적하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탈해의 출생은 대략 혁거세왕 39년으로 보면 남해왕대에 대보로 임명되었다는 기사와 상당히 연관성을 가지고 연결된다고 봅니다.
livemiri 曰
제 글을 꾸준히 읽어보았다면 석탈해의 탄생이 언제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님의 댓글을 보면서 느끼는 생각은 님이 예전의 제 글을 읽어 보지 않았던지, 아니면 읽었더라도 시간이 오래되어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았어요.
예전 저의 주장은 석탈해의 재위기간은 서기 154년에서 184년까지이니, 즉위 時의 나이 62세를 이용하여 탄생한 해를 계산하면 서기 93년임을 주장하였어요. 지금 작성하고 있는 글들은 이러한 예전 나의 주장에서 부족한 부분에 대한 추가설명과 조금씩 잘못된 오류를 수정하는 패치버전이라고 이해하면 될 겁니다.
삼국사기에 있는 신라왕력의 올바른 복원은 삼국사기가 가지고 있는 解法에 따라 올바로 수정을 하면 됩니다.
□□□님 曰
대개는 청예를 수로로 보고 있으며, 청예는 파사왕대에 비로서 나타납니다.
파사왕대는 이미 탈해가 죽고 없던 시기이지요.
아마도 청예의 처가 황옥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당유고에도 청예가 죽은 시기가 대략199년경이므로 서기42년에는 청예는 나타날 수 없으므로 대략 수로와 청예를 다른 인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livemiri 曰
예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박창화가 창작한 화랑세기를 위시한 그의 저작물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냥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읽어보면 재미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굳이 읽어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요. 최근에 □□님께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데, 저도 □□님의 주옥같은 글들에 대해 대부분 동의해요.
그리고 저 또한 몇 페이지 뒤에 화랑세기가 소설일 수 밖에 없는 이유 몇 가지를 언급해 놓았어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livemiri (2011-02-12 18:26:57)
□□님 曰
구전 전설을 역사 기록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겠죠. 김부식 선생도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초기 신라 기록에 나오는 인물들과 그들 행적은 상징과 은유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은 접근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livemiri 曰
아마 제가 시나리오 작가라면^^ 초기신라 기록에 나오는 인물들과 그들 행적을 상징과 은유로 해석했을 것입니다.
□□님 曰
그럼에도 초기 신라 일식 기록이 양자강 유역에서 놀라울 정도의 결집도를 보이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죠. 그래서 삼국사기 초기 신라 기록을 버리기가 힘든 것이죠.
livemiri 曰
저는 ‘박라논문’을 예전에 저의 사고 속에서 폐기처분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신라가 양자강유역에 있었느니 뭐니하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님 曰
저는 양자강 유역과 지금 경주지역의 연결고리를 해상 이동에서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탈해 기록이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관심이 많습니다. 경주에 있는 석탈해 묘는 후대에 사람들이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지 거기 묻혔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릉도 마찬가지고 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경주에 남았는 것은 겉이름 뿐이라고 봅니다.
livemiri 曰
저도 석탈해왕릉이나 오릉 등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석탈해나 박혁거세의 무덤이라는 것에는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석탈해왕이나 박혁거세왕은 죽은 후 지금의 경주땅에 묻혀있을 것’이라 판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