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夷狄更相攻伐

livemiri 2012. 5. 26. 00:07

글쓴이
livemiri(2012-05-25 23:32:50, Hit : 0, Vote : 0)
연결 #1
http://blog.paran.com/livemiri
연결 #2
livemiri@paran.com
제목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夷狄更相攻伐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夷狄更相攻伐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크게 夫餘(國有君王), 高句麗(其國有王), 동옥저(無大君王), 挹婁(無大君王), 濊(無大君王), 韓(辰王), 倭人(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의 7개 항목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그 7개 중 부여, 고구려, 韓, 倭에는 그 땅을 다스리는 王이 있는데 동옥저, 읍루, 濊에는 大君王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옥저 // 無大君王,世世邑落,各有長帥。
挹婁 // 無大君長,邑落各有大人。
濊 // 無大君長,自漢已來,其官有侯邑君、三老,統主下戶。



동옥저와 濊에 大君長이 없는 이유를 살펴보자.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에 위만 조선의 성립과 한사군의 성립 그리고 그 후의 시정들이 조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① 准既僭號稱王,爲燕亡人衛滿所攻奪,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其後絕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② 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
③ 桓、靈之末,韓濊強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
④ 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
⑤ 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

위 기록 ②,③을 보면 漢나라 때 樂浪郡에 속하여 四時로 朝謁하였고, 후한 환제(서기147년~167년), 영제(서기168년~189년) 말엽에 韓, 濊가 強盛하여 군현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자 많은 民들이 韓國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좀 막연한 기록인데 이때의 상황이 동옥저전과 예전에서 조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옥저 지역의 변화추이 (livemiri주: 앞글에 있는 필자의 번역문을 참고 바람)

⑥ 元封2년(서기전 109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沃沮城으로써 玄菟郡을 삼음(元封 4년)
⑦ 後에 玄菟郡을 句麗西北으로 옮기고, 沃沮를 樂浪에 還屬함(元鳳6년 서기전 75년)
⑧ 그 후 單單大領의 東쪽의 領東七縣에 東部都尉를 分置함
⑨ 광무제 6년(서기 30년) 邊郡을 줄이면서 都尉를 폐지 ==> 현의 渠帥로써 縣侯를 삼으니 不耐, 華麗, 沃沮등은 侯國이 됨 (부연 설명//실질적으로 漢의 지배력이 거의 없는 독립국의 상태가 됨으로써 不耐濊侯는 功曹, 主簿의 諸曹를 두어 邑落을 통치하고 여러 縣侯들은 三老라 自稱함)



濊 지역의 변화 추이

(10) 朝鮮侯 準, 燕人衛滿, 한무제의 한사군 설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한 후,
(11)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自領印七縣,都尉主之,皆以濊爲民。後省都尉,封其渠帥爲侯,今不耐濊皆其種也。漢末更屬句麗。(單單大山領으로부터 서쪽은 樂浪에 屬하었으며, 領으로부터 동쪽 七縣은 都尉가 다스렸는데, 모두 濊로써 民을 삼았다. 후에 都尉를 폐지하고 渠帥를 封하여 侯로 삼았다. 지금의 不耐濊가 모두 그 종족이다. 漢末에 구려에 更屬되었다. )




(11)번의 기록은 동옥저 지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예와 옥저의 위치관계를 살펴보자.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 기록을 보면 單單大山領 동쪽의 바닷가 지역에서 濊와 沃沮는 남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무제에 의하여 설치된 한사군은 설치 후 30년도 못된 始元5년(서기전 82년)에 진번, 임둔군이 폐지되고 그 속현들은 樂浪, 玄菟郡에 병합되었다.

참고 // 필자는 한사군이 설치된 영역을 낙랑군은 위만조선이 있던 대동강 유역의 王險城지역과 그 주변부로, 그리고 진번군은 낙랑군의 남쪽에 -후에 대방군이 설치되는 지역으로,- 그리고 玄菟郡은 옥저성이 있는 원산만유역 북쪽에, 그리고 임둔군은 옥저 남쪽의 濊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옥저전과 예전을 종합하여 판단해 보면 元封2년(서기전 109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사군이 설치되는데 원봉 3년 낙랑, 진번, 임둔군이 설치되고 1년 후인 元封 4년에 沃沮城을 중심으로 玄菟郡이 설치된다. 그러나 始元 5년(서기전 82년)에 진번, 임둔군이 폐지되고 그 속현들은 樂浪, 玄菟郡에 병합되었다. 그런데 元鳳6년(서기전 75년) 玄菟郡마저 句麗西北으로 移置되자 沃沮를 포함한 單單大山領 서쪽 지역은 樂浪에 還屬되게 된다. 그러나 영역이 너무 넓어 다스리기가 힘이 드니 이번에는 單單大山領 동쪽 지역의 7縣에 동부도위를 설치하였으니 그 후 그마저도 철폐하게 되니 單單大山領 동쪽은 이제 군웅이 할거하여 전쟁을 통하여 통합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이 동옥저전에는 후한 광무제 6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의 상황에 “夷狄更相攻伐,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皆濊民作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夷狄更相攻伐’에서 말하는 夷狄이 바로 單單大山領 동쪽의 동옥저, 예 등의 지역에서 반독립적으로 자치를 누리던 세력들을 말하며 그들이 相攻伐하였다는 것이다.
전쟁이 있으면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는 법,, 그래서 전쟁 후에는 그 전쟁에 대한 배상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쟁과 관련된 모습을 진수는 예전에 기록해 두었다.

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分,不得妄相涉入。...
其邑落相侵犯,輒相罰責生口牛馬,名之爲責禍。...

그 지역이 각기 侯, 邑君, 三老 등이 각각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下戶를 統主하니 상대의 지역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자가 상대의 지역을 侵犯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승패가 갈리고 敗者는 生口나 牛馬로 배상한다는 이야기이다.(livemiri주 // 필자는 이 生口를 노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삼국사기를 펼쳐보면 광무제 6년(서기 30년) 都尉가 폐지된 후, 옥저나 濊 지역의 華麗縣, 不耐縣, 貊國 등이 그 남부의 신라와 교섭하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夷狄更相攻伐’도 오래가지는 못한 듯하다.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옥저와 예를 병합해 버렸기 때문이다.

國小,迫於大國之間,遂臣屬句麗。 // 동옥저
漢末更屬句麗。 // 濊



고구려에 臣屬한 이후로 이 지역은 또 한 번 변혁을 맞이하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동부여전에는 毌丘儉이 句麗王 宮을 추격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毌丘儉討句麗,句麗王宮奔沃沮,遂進師擊之。沃沮邑落皆破之,斬獲首虜三千餘級,宮奔北沃沮。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南北皆同,與挹婁接。
// 毌丘儉이 句麗를 토벌하니 句麗王 宮이 沃沮로 달아났는데, 드디어 군사를 진격하여 격파했다. 沃沮의 邑落은 모두 깨지고, 머리를 베이고 포로로 잡힌 자(斬獲首虜)가 삼천餘級이었다. 宮이 北沃沮로 달아났다. 北沃沮는 일명 치구루이다. 거리는 남옥저에서 팔백여리이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다. 挹婁와 접한다.








다음에 계속,....
ver. 0. 000. 0510. 0521



























잡담:ㅋㅋㅋ

[번역] 삼국지 위지 동이전 濊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戶二萬。
濊는 남쪽으로 辰韓과, 북쪽으로 高句麗, 沃沮와 접하고, 동쪽으로 大海에 닿았으니, 지금 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戶는 2만이다.

昔箕子既適朝鮮,作八條之教以教之,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예전 箕子가 이미 朝鮮에 가서 八條之教를 만들어 가르치니, 집의 문을 닫지 않아도 民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其後四十餘世,朝鮮侯(淮)僭號稱王。
그 후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王이라 號稱했다.

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陳勝 등이 일어나고 천하가 진나라에 叛하니, 燕, 齊, 趙民 數萬口가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燕人衛滿,魋結夷服,復來王之。
燕人 衛滿이 魋結夷服하고 와서 王이 되었다.

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爲四郡。自是之後,胡、漢稍別。
漢 武帝는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나누어 四郡을 설치하였다. 이 후로부터 胡와 漢이 점차 구별되었다.

無大君長,自漢已來,其官有侯邑君、三老,統主下戶。
大君長이 없고 漢이래로부터 관직은 侯, 邑君, 三老가 있어서 下戶를 통치하였다.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其人性願愨,少嗜欲,有廉恥,不請(句麗)匄。
노인들은 예전부터 스스로 ‘句麗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말하였다. 人性은 삼가고 조심하여 욕심이 적고, 廉恥가 있어 구걸을 청하지 않는다.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衣服有異。男女衣皆著曲領,男子擊銀花廣數寸以爲飾。
언어와 法俗은 대체로 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의 의복은 모두 분명히 曲領인데, 남자는 銀花를 두드려 넓이가 數寸인 것으로써 장식한다.

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自領印七縣,都尉主之,皆以濊爲民。後省都尉,封其渠帥爲侯,今不耐濊皆其種也。漢末更屬句麗。
單單大山領으로부터 서쪽은 樂浪에 屬하었으며, 領으로부터 동쪽 七縣은 都尉가 다스렸는데, 모두 濊로써 民을 삼았다. 후에 都尉를 폐지하고 渠帥를 封하여 侯로 삼았다. 지금의 不耐濊가 모두 그 종족이다. 漢末에 구려에 更屬되었다.

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分,不得妄相涉入。同姓不婚。多忌諱,疾病死亡輒損棄舊宅,更作新居。有麻布,蠶桑作綿。曉候星宿,豫知年歲豐約。不以誅玉爲寶。
그들의 풍속은 山川을 중시하여 산과 내는 각기 부분이 나뉘어져 있어 함부로 서로(相)가 들어갈 수 없다. 同姓은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는 것이 많아 질병이나 사망하게 되면 항상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거처를 만든다. 麻布가 있고, 누에를 쳐서 綿을 만든다. 별자리의 조짐을 살피어 미리 年歲의 豐約을 알아낸다. 珠玉으로써 보물을 삼지 않는다.

常用十月節祭天,晝夜飲酒歌舞,名之爲舞天,又祭虎以爲神。其邑落相侵犯,輒相罰責生口牛馬,名之爲責禍。殺人者償死。少寇盜。
항상 10월에 祭天하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니, 이를 이름하여 ‘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祭하고 神으로 여긴다. 邑落에 서로(相)가 침범하면 항상 서로(相)가 生口나 소, 말로 罰責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責禍’라 한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죽음으로 보상하고 도둑질하는 자는 적다.

作矛長三丈,或數人共持之,能步戰。樂浪檀弓出其地。其海出班魚皮,土地饒文豹,又出果下馬,漢桓時獻之。
矛을 만드는데 길이가 3丈으로 간혹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며 步戰에 능숙하다. 樂浪의 檀弓이 이곳에서 나온다. 바다에서는 班魚皮가 산출되며, 土地는 기름지다. 文豹가 있고 또 果下馬가 나는데 후한 桓帝 때 獻上하였다.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舉邑降。
正始 6년(서기245년)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은 領으로부터 東쪽의 濊가 구려에 속해있어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耐侯 등이 邑을 들어 항복하였다.

其八年,詣闕朝貢,詔更拜不耐濊王。居處雜在民間,四時詣郡朝謁。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遇之如民。
8년(서기 247년) 闕에 와서 조공하므로 詔를 내려 不耐濊王으로 更拜하였다. 民間에 섞여서 居處하면서 四時로 郡에 와서 朝謁하였다. 二郡이 軍征, 賦調가 있으면 役使를 供給하게 하여 民처럼 대우하였다.

////// 번역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