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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신라 초기 왕력 복원

livemiri 2023. 12. 2. 20:02

들어가며...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요인 중에 하나로 왕들의 비정상적인 가계를 들 수 있다. 한 예로 제7대 왕으로 기록되어있는 일성이사금은 서기 134년에 즉위하여 154년에 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성이사금의 즉위년조를 보면 逸聖尼師今立 儒理王之長子 或云日知葛文王之子 妃朴氏 支所禮王之女라고 기록되어있어 유리왕의 장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異說로 일지갈문왕의 아들이 추가되어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확인해 보면, 유리왕은 서기 24년에 왕위에 올라 서기 57년에 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유리왕이 한 해에 일성이 태어났더라도 77세 즈음에 왕위에 올라 97세에 사망한 것이 된다. 유리왕이 한 후 탈해, 파사, 지마가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장자의 신분이었지만 유리왕이 한 후 바로 왕위를 잇지 못하고 지마가 한 후 노년에 왕위를 이었다는 것은 무척 부자연스럽다.

 

또 삼국사기에 4대로 설정되어있는 탈해이사금은 8대 벌휴이사금과 祖孫관계로 되어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즉위년조의 기록을 보면, 탈해이사금은 서기 57년에 6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23년을 왕위에 있다가 서기 80년에 한다. 그런데 벌휴이사금은 서기 184년에 왕위에 오른다. 석탈해가 한 후 104년을 지나 그 손자 벌휴이사금이 신라왕이 된 것이다. 이것도 너무나 부자연스럽다.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이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 4대 왕으로 설정되어있는 탈해이사금이 먼저 떠오른다. 7명의 박씨 왕들 사이에 석씨 왕이 끼어있는 것은 이상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탈해이사금의 위치를 아달라이사금과 벌휴이사금 사이로 옮기고, 탈해이사금의 자리에 일성이사금을 넣어보면 무언지 모르게 아구가 맞아들어가는 느낌이다. 9대 벌휴이사금은 탈해의 손자이니 탈해를 아달라이사금 뒤로 옮기면 벌휴이사금과의 조손 관계가 자연스럽게 복원되고, 탈해를 옮긴 빈자리에 일성을 보내면 유리와 일성 사이의 생물학적인 부자 관계도 자연스럽게 복원된다. 과연 이러한 추론이 가능할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신라 초기 왕력 복원 Ver0.1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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