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行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

livemiri 2013. 3. 21. 21:55


글 쓴 이  
   livemiri  (2013-03-21 21:52:21, Hit : 0, Vote : 0)
연 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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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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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行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
『남제서』의 기록에서 남제의 황제가 백제왕 牟大에게 孫副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牟大를 策命으로 亡祖父 牟都를 이어서 行都督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으로 삼았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생략,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使兼竭者僕射孫副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
생략, 制詔行都督百濟諸軍事、鎮東大將軍百濟王牟大今以大襲祖父牟都爲百濟王,即位章綬等玉銅虎竹符四。王其拜受,不亦休乎!

이 기록에서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이 있다. 牟大나 牟都가 남제의 황제로부터 ‘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으로 제수를 받는 부분이다. 이 ‘百濟諸軍事’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앞서 언급하였지만 백제왕 牟大는 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幹那 등이 魏虜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에 대하여 남제에 표문을 올려 그들에게 邁羅王, 辟中王, 弗中侯, 面中侯 등의 작위를 정식으로 받아 준다. 필자는 여기에 보이는 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幹那 등을 백제왕족과 같이 남하한 세력이 아니라 한성백제가 금강유역으로 남하한 후 그 곳에서 접촉하는 마한인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들은 백제왕과는 세력기반이 다른 존재들이다.

중국의 정사 기록에서 백제왕에 대한 책봉 기록을 찾아보면 먼저 『晉書』에 나타난다. 기록을 보면 ‘(咸安)二年(372년)春正月 百濟遣使貢方物’이 이루어진 이후 그해 六月에 ‘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太元九年 秋七月) 百濟遣使來貢方物’이 있고 난 후, 그 다음해(386년) 夏四月에 百濟王世子餘暉을 使持節都督鎮東將軍百濟王으로 삼는다. 이러한 기록은 먼저 백제가 遣使하여 책봉을 요구하고, 그 후 일정시간이 경과한 후 晉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晉書』에 기록된 백제왕의 책봉기록은 이 두 개가 전부이다. 그 후로 백제왕에 관련된 책봉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宋書』 「夷蠻列傳」을 보면 백제왕의 책봉기록이 다시 나타난다. 먼저 義熙十二年(서기 416년)에 百濟王餘映을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鎮東將軍 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실 義熙十二年(서기 416년)은 晉 恭帝의 재위기간인데 이 기록이 『晉書』에는 보이지 않는다. 계속하여 『宋書』 「夷蠻列傳」 百濟를 살펴보면 서기 420년 宋 高祖가 백제왕 餘映을 鎮東將軍에서 鎮東大將軍으로 승격시켜준다. 元嘉七年(서기 430년)에 ‘百濟王餘毗復修貢職, 以映爵號授之’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餘毗 또한 鎮東大將軍에 책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晉書』의 기록은 백제왕에게 ‘百濟諸軍事’라는 책봉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비해 『宋書』의 기록은 백제왕에게 百濟諸軍事라는 표현이 더해져 있다. 그렇다면 ‘百濟諸軍事’이니 ‘將軍, 大將軍’이라고 하는 것들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이에 대하여 명쾌한 답변을 주는 것이 『宋書』 「夷蠻列傳」의 다음 기록이다.

毗死,子慶代立。世祖大明元年,遣使求除授,詔許。二年,慶遣使上表曰:「臣國累葉,偏受殊恩,文武良輔,世蒙朝爵。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等十一人,忠勤宜在顯進,伏願垂湣,並聽賜除。」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爲冠軍將軍。以行征虜將軍左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並爲征虜將軍。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並爲輔國將軍。以行龍驤將軍沐衿、餘爵並爲龍驤將軍。以行甯朔將軍餘流、麋貴並爲甯朔將軍。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並爲建武將軍。

世祖 大明元年(서기 457년)에 백제왕 餘慶은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鎮東將軍 百濟王으로 책봉된다. 그 1년 후 백제왕 餘慶은 위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송으로부터 餘紀等十一人에게 ‘□□將軍’ 칭호를 받아준다. 앞서 살펴본 『南齊書』 「東南夷列傳」도 백제왕이 남조로부터 책봉되는 과정이 위 『宋書』의 기록과 비슷하다. 이처럼 『宋書』나 『南齊書』의 「백제전」에 기록되어 있는 책봉명이 전해주는 사실은 바로 백제왕과 지방토호세력이나 군벌세력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백제왕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공훈이 있는 장군들에게 남조에 요청하여 여러 ‘將軍호’나 ‘王, 侯, 太守’ 등의 칭호를 얻어주게 된다. 그리고 백제왕은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의미로 ‘百濟諸軍事’ 그리고 장군들을 다스리는 장군이라는 의미의 ‘大將軍’이라는 책봉명을 함께 얻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무령왕릉묘지석』에 보이는 바와 같이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는 표현을 무덤 속에까지 가져가는 것으로 볼 때 斯麻王은 살아생전 寧東大將軍이라는 책봉명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필자는 이러한 문헌기록의 분석을 통하여 『무령왕릉묘지석』에 기록되어 있는 土王, 土伯, 土父母 등의 존재는 도교사상에 假託하여 기록한 마한지역의 지방토호세력이나 군벌세력으로 이해한다.

결국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공격에 초토화된 한성백제는 실질적으로 멸망을 하고 위례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도망 온 망명정부가 새롭게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 9999. 미나리미나리
















잡담 :

이른 아침 밀양으로 가는 즐거운 길
한 번 쯤 길을 바꾸어 구불구불 산길을 가보세.
아침 햇살에 눈 앞 가득 반짝임이 가득한 곳이 있다네.
흡사 하늘에서 내려온 구름이 긴 행렬을 이루고
서로 다투듯이 하얀 고치를 만들었네.
고치는 미나리 속살을 정성 가득 품으니
은은하고 청순함이 담긴 진한 향기
온 세상에 진동하네.
햇살 가득 담긴 향기를 입안 가득 넣고자
다 함께 한재골 미나리 마을로 가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