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廣開土大王碑文 永樂 6年條

livemiri 2010. 3. 13. 05:48
글쓴이
livemiri(2008-12-22 12:20:55, Hit : 1124, Vote : 298)
제목
廣開土大王碑文 永樂 6年條
김성호박사의 利殘國과 百殘國


김성호박사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1982 초판발행]에 있는 利殘國과 百殘國에 대한 부분이다. p79부터 옮겨보면,

/////인용 시작

廣開土大王碑文 永樂 6年條에서 先行節(辛卯年條)을 제외한 本文만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 軍□□首攻取壹八城․․․․․․(17城名)․․․․․․,․․․․․․(37城名)․․․․․․其國城 賊不服氣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3城名)․․․․․․百殘王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迷之御 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 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永樂6年 丙申(AD 396)에 廣開土大王은 水軍을 친히 이끌고 「利殘國」을 토멸했다. 처음에 軍□城을 비롯해 18개 성을, 다음에 37개 성을 공취하였다. 其國城(백제)에 당도했음에도 「百殘王(백제왕)」이 대항하자, 대노한 廣開土大王은 阿利水(한강)을 건너서 刺로 하여금 3개 성을 공격케 했다. 곤핍해진 百殘王은 男女生口 1千人과 細布 1千匹을 바치고 귀순하여 ‘지금부터 영원히 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왕은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복종할 것을 기록하게 했다. 이 때에 58성과 700개 촌락을 공파하고, 殘王의 동생과 十臣을 데리고 귀환했다.

위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利殘國을 토멸했다는 「王躬率水軍 討利殘國」이다. ,.....

<중간 생략>

첫째로, <중간 생략>
둘째로, 利殘은 광개토대왕의 水軍에 토멸되었고, 百殘은 男女生口와 細布를 바치고 항복했다. 멸망한 利殘과 항복한 百殘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는가? 文章構成의 문법적 논리로도 동일성은 허용될 수 없다. 이 점은 이들이 동일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構造的인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利殘은 이 해(AD 396)에 멸망하였으나,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했던 百殘은 AD 660까지 존속했다. 멸망연도가 다른 두 나라가 한 나라일 수 없음은 명백하다.
셋째로, <이하 생략>

///// 인용 끝

위 인용문에서 보인 바와 같이 김성호박사는 광개토왕비문의 永樂 6年條의 기록을 통하여 2개의 나라(利殘과 百殘)를 전쟁 상대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성호박사는 자신의 후속 연구에서 「王躬率水軍 討利殘國」에 대한 비문 판독을 「王躬率水軍 討伐殘國」으로 수정한다. 2개의 나라는 殘國과 百殘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논지는 위 인용문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과연 광개토대왕은 永樂 6年에 2개의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하였을까?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首攻取壹八城․․․․․․(壹八城 이하 城名이 죽 나열되어 있음. 50여개로 추정됨)․․․․․․其國城 賊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百殘王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迷之御 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 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판독자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음. 가령 殘王을 殘主, 등)

1.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六年 丙申에 왕이 몸소 水軍(大軍으로 판독하는 연구자도 있음)을 이끌고 殘國을 토벌하였다.

2. 軍□□首攻取壹八城․․․․․․․․․․․․,
軍은 □□ 먼저 壹八城, (,....50여개의 성이 나열되어 있음)을 攻取하였다.
왕건군은 그의 연구에서 ‘글자가 확실한 것은 48개 성이고, 城이라는 자 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 3개로, 합계 51성이다. 그 외의 완전히 결락된 부분의 자수로 보아, 성의 이름을 2자나 3자로 하여 계산하면 7성이 되어, 이를 더하면 딱 58성이 된다.’고 하였지만,...

3. □其國城 賊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其國城 앞에 몇 개의 판독되지 않은 결락자가 있다. 그러나 其國城에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앞 문장이 먼저50여개의 성을 공취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그 뒤는 그 여세를 몰아 ‘그 왕성(國城)에 도달하였다.’ 또는 ‘그 왕성(國城)을 핍박하였다.’는 의미가 되어야할 것이다. 그래서, □其國城을 至其國城이나 逼其國城으로 읽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살펴볼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다. □其國城에서 ‘其’의 쓰임이다. 이 ‘其’의 쓰임은 지시대명사다. 그러니 이 ‘其’가 가리키는 대상이 있어야한다. 문장에서 찾아보자. 앞 문장에 바로 보인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에서 殘國이 바로 그 대상이다.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殘國과의 전쟁이 진행되는 推移를 파악해 보면, 먼저 殘國 외곽의 50여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이제 其國城에서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비문은 전쟁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賊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적이 義에 복종하지 아니하고, 감히 나와 싸우므로 왕께서 크게 성내시어 阿利水를 건너,....)

그 후 백제왕은 머리를 땅에 찍으면서 항복문서에 도장을 찍는다.





김성호박사는 文章構成의 문법적 논리를 내세우면서 2개의 국가라고 하였지만 그는 자의적인 엉터리 해석을 한 것이다. 비문을 읽어 보면, 그 어디에도 2개의 국가로 구분되어 있는 표현을 발견할 수 없다. 이제 김성호박사의 殘國은 마땅히 폐기되어야할 귀무가설이다. 그는 4세기말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떠나간 한 무리의 인간들을 역사기록의 비교를 통하여 찾았지만, 그 들의 실체를 잘못 비정한 것이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그의 가설을 추종하는 자들과 그 아류들이 있다. 문법적 한계를 뛰어 넘는 추론은 처음부터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글들은 쓰레기가 될 수 밖에 없다.
<계속>




ver. 0.0.017710-1(일부 오타 수정)
감사합니다.

라디오 (2008-12-22 12:30:11)
이진희 교수의 광개토비문 조작설도 신뢰성을 잃은 마당에..김성호 가설을 추종하다니.. 그런 거 추종하지 않아도 밣혀 낼 비밀은 많죠.
livemiri (2008-12-22 12:38:45)
라디오님이 (2008-12-22 12:30:11)에 쓰신 글

이진희 교수의 광개토비문 조작설도 신뢰성을 잃은 마당에..김성호 가설을 추종하다니.. 그런 거 추종하지 않아도 밣혀 낼 비밀은 많죠.


/////////////// livemiri
저는 누구의 가설도 추종하지 않습니다. 단지 여러 연구자들이 연구한 내용 중 가장 합리적인 것을 선택할 뿐입니다.(그 것을 추종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제 글에서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 있다면 님도 반론을 하시면 됩니다.

저를 김성호 가설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판단하시다니요,..ㅠ,ㅠ 제 글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라디오 (2008-12-22 12:43:57)
"그의 가설을 추종하는 자들과 그 아류들" 그렇게 심한 말을.. 구태백제 추종하는 어떤 분은 열받겠군요.
livemiri (2008-12-22 14:15:17)
명백한 오타가 몇 개 있어서 새롭게 수정한 글입니다.
소벌가리 (2008-12-22 15:43:16)
라디오님 토론은 좋지만 예의는 갖추어주십시오. 토론 내용과 상관없는 인신공격은 좋은 자세는 아닌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