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輔國將軍本國王 加羅王荷知와 鎮東大將軍 倭王武

livemiri 2010. 3. 13. 05:57
글쓴이
livemiri(2009-01-03 16:37:09, Hit : 979, Vote : 267)
제목
輔國將軍本國王 加羅王荷知와 鎮東大將軍 倭王武
輔國將軍本國王 加羅王荷知와 鎮東大將軍 倭王武



동이는 穢(濊), 貊, 倭, 韓으로 구분되며, 그들은 종족적 기반이 전혀 다른 존재들이다. 광개토비문에도 수묘인으로써 韓과 穢가 언급되어 있는데, 韓은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新羅, 百殘, 任那加羅를 구성하는 종족들이며, 穢는 東夫餘 등을 구성하는 종족들이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6년 백제와 전투에 승리하고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그리고 殘王弟와 大臣十人을 잡아온다. 그리고, 영락 10년의 任那加羅 전투를 보면 성이 즉각 귀복(城卽歸服)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록을 통하여 전투의 양상이 심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전투의 승리 후에도 영락6년 대 백제 전투에 상응하는 전리품을 챙겨왔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전쟁을 통하여 집적 잡아온(?) 韓과 穢에게 수묘를 맡기라고 存時敎言하였다. 이 때 잡혀온 韓족이 수묘인으로 편제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비문에는 倭가 도배되어 있는데,.... 반면 수묘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倭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이 倭를 不可觸賤民[untouchable]으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수묘를 시키지 않았을까?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 守墓氵西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氵西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卅 看烟三百 都合三百卅家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守墓人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출처 : 고구려연구회)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가 세위지기 전후의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면, 비문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 남부에는 3개의 영역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바로 신라, 백제, 그리고 임나가라이다. 영락10년의 전쟁 이후 임나가라의 응신왕은 전쟁에 패배하고 일본열도로 도망가서 새로운 국가를 건립한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는 친고구려의 임나가라 정권이 세워진다.

전쟁이 끝나고 광개토왕릉비가 세워질 즈음 만백성과 수묘인들이 늘 쳐다보는 비문에 임나가라를 떠난 무리는 倭로 떠나지 않은 무리들은 韓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흔적이 후에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와 [남제서]에 나타난다.

송서와 남제서에 贊, 珍, 濟, 興 武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이 일본고대사에 등장하는 [왜5왕]이다. 이 들은 송과 남제에 조공을 하면서 하나 같이 自稱 使持節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六國 또는 七國 諸軍事安東大將軍 倭國王을 요구한다. 홀연히 역사 기록에 등장하여 밑도 끝도 없이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의 주인이라 요구하는 이들의 실체는 누구인가? 바로 이들이 앞서 말한 영락10년의 임나가라전투에서 패배하여 일본열도로 떠나간 무리들이다.


그리고 남은 무리들은 남제서에 기록을 남긴다.



남제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서기479년),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倭國,在帶方東南大海島中,漢末以來,立女王。土俗已見前史。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鎮東大將軍。

建元元年은 남제 高帝의 즉위년이다.


南齊 1代 고제 [高帝, 427~482]
///
중국 제나라를 세운 황제. 송나라 말 내란에서 공을 세워 중령군 장군이 되자 중앙군을 완전히 장악하여 순제를 폐위시키고 479년 제나라를 세웠다. 우완지의 건의에 따라 호적 정리를 실행하였으나 반발이 심했다. 재위 4년만에 병사하였다.
/// 출처 : http://100.naver.com/


남제서의 기록을 보면 남제의 고제는 그가 즉위한 建元元年(서기479년)에 加羅王 荷知에게 輔國將軍 本國王을 그리고 倭王 武에게 鎮東大將軍을 내린다. 이 기록은 광개토대왕의 남정이후 임나가라의 영역에 대한 제3자[송,남제]의 최종판단이다. 결국 남은 加羅가 本國王으로 인정을 받게 되고, 떠난 자는 이제 [왜]라는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 후 일본서기에는 자신들이 버리고 떠난 땅에 대하여 한없이 그리움을 표시하고 있다. 이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의 진실이다.



<계속>

ver. 0.00000. 20090103

감사합니다.



잡담 : 늦게나마 기축년 새해를 맞이하신 모든 분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소벌가리 (2009-01-03 19:06:12)
잘 읽었습니다. 아직은 무자년입니다. 1월 26일부터 기축년입니다^^
그렇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브리야트 (2009-01-03 19:52:14)
두가지부분을 말하고 싶습니다...아니 둘 더해서 4가지입니다.

불가촉천민이라는 것보다는 이질적요소 이민족이라는 생각이 아닐까합니다.. 말갈이나 거란등은 없으니까요...

두번째는 임나가라가 영역국가였다는 인식과 응신천왕의 출자를 가야로 기록한 부분입니다.. 님과 비슷한 견해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를 들수 있을것 같습니다...그러나 님의 견해는 우선 임나가야의 성격규명과 함께 영역국가로 불수 잇는 근거가 아직은 미흡해보입니다...이런 부분을 충족하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아직은 무리인듯,

세번째는 종주권을 요구하는 부분은 일종에 뻥을 치는 외교이다는 견해에 더 비중을 두고 싶군요.....이부분은 언젠가 한번 자세히 다뤄보고 싶은 부분이나 아직내공이 쌓이지 않아 그러합니다....
약간만 말한다면, 당시 중국남조가 한반도나 구주지역에 이전 관구검침입후의 서진시기와는 달리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던시기에 그러합니다...

네번째는 책봉되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그 책봉된것은 요즘 용어로 백작 공작하는 일종의 관작이므로 그 작위의 높고 낮음도 검토되었으면 합니다....
브리야트 (2009-01-03 19:57:07)
불가촉천민이라는 것보다는 이질적요소 이민족이라는 생각이 아닐까합니다.. 말갈이나 거란등은 없으니까요... 이런한견해가 다소 현대적인 민족의식속의 안이한 판단일지도 모르나....비문의 기록으로 어느정도 이렇게 해석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고구려인 다음에 한,과 예를 말하니까요



그리고 예에 대하여 동부여...이것이 혹 위지동이전이 동예가 동부여로 연관된다는 인식인지 아니면, 모용황의 부여 공파이후 나온 갈사왕의 동부여로 그래서 예족이라 인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다 그러하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여하튼 저는 동예가 이후 동부여와 어떤식으로든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기에 저에게는 흥미로운 견해입니다....
livemiri (2009-01-03 23:27:36)
소벌가리님이 (2009-01-03 19:06:12)에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아직은 무자년입니다. 1월 26일부터 기축년입니다^^
그렇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 livemiri

제 글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소벌가리님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벌가리님도 올 한 해 소원하시는 바를 모두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livemiri (2009-01-03 23:28:01)
브리야트님이 (2009-01-03 19:52:14)에 쓰신 글

두가지부분을 말하고 싶습니다...아니 둘 더해서 4가지입니다.

불가촉천민이라는 것보다는 이질적요소 이민족이라는 생각이 아닐까합니다.. 말갈이나 거란등은 없으니까요...

두번째는 임나가라가 영역국가였다는 인식과 응신천왕의 출자를 가야로 기록한 부분입니다.. 님과 비슷한 견해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를 들수 있을것 같습니다...그러나 님의 견해는 우선 임나가야의 성격규명과 함께 영역국가로 불수 잇는 근거가 아직은 미흡해보입니다...이런 부분을 충족하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아직은 무리인듯,

세번째는 종주권을 요구하는 부분은 일종에 뻥을 치는 외교이다는 견해에 더 비중을 두고 싶군요.....이부분은 언젠가 한번 자세히 다뤄보고 싶은 부분이나 아직내공이 쌓이지 않아 그러합니다....
약간만 말한다면, 당시 중국남조가 한반도나 구주지역에 이전 관구검침입후의 서진시기와는 달리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던시기에 그러합니다...

네번째는 책봉되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그 책봉된것은 요즘 용어로 백작 공작하는 일종의 관작이므로 그 작위의 높고 낮음도 검토되었으면 합니다....



브리야트님이 (2009-01-03 19:57:07)에 쓰신 글

불가촉천민이라는 것보다는 이질적요소 이민족이라는 생각이 아닐까합니다.. 말갈이나 거란등은 없으니까요... 이런한견해가 다소 현대적인 민족의식속의 안이한 판단일지도 모르나....비문의 기록으로 어느정도 이렇게 해석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고구려인 다음에 한,과 예를 말하니까요



그리고 예에 대하여 동부여...이것이 혹 위지동이전이 동예가 동부여로 연관된다는 인식인지 아니면, 모용황의 부여 공파이후 나온 갈사왕의 동부여로 그래서 예족이라 인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다 그러하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여하튼 저는 동예가 이후 동부여와 어떤식으로든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기에 저에게는 흥미로운 견해입니다....



/////////////// livemiri

죄송합니다. 제가 취중이라 차차 말씀 드리겠습니다.
브리야트 (2009-01-04 00:24:38)
답변기대하겠습니다....
livemiri (2009-01-05 14:33:00)
브리야트님/ 위에 새롭게 답변글을 작성한 것에 대하여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