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브리야트님/4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livemiri 2010. 3. 13. 06:06
글쓴이
livemiri(2009-01-05 14:26:45, Hit : 1152, Vote : 318)
제목
브리야트님/4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부리야트님
몇 일 전 님께서 저에게 4가지를 질문하셨는데, 제가 이해하고 있는 한도 내에서 답변을 드립니다.

브리야트님 曰

불가촉천민이라는 것보다는 이질적요소 이민족이라는 생각이 아닐까합니다.. 말갈이나 거란등은 없으니까요... 이런한견해가 다소 현대적인 민족의식속의 안이한 판단일지도 모르나....비문의 기록으로 어느정도 이렇게 해석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고구려인 다음에 한,과 예를 말하니까요

그리고 예에 대하여 동부여...이것이 혹 위지동이전이 동예가 동부여로 연관된다는 인식인지 아니면, 모용황의 부여 공파이후 나온 갈사왕의 동부여로 그래서 예족이라 인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다 그러하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여하튼 저는 동예가 이후 동부여와 어떤식으로든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기에 저에게는 흥미로운 견해입니다....

livemiri 曰

제가 불가촉천민이라는 표현을 한 의도를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먼저 제 글을 다시 보면

///인용
그러나 비문에는 倭가 도배되어 있는데,.... 반면 수묘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倭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이 倭를 不可觸賤民[untouchable]으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수묘를 시키지 않았을까?
<중간 생략>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가 세위지기 전후의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면, 비문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 남부에는 3개의 영역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바로 신라, 백제, 그리고 임나가라이다. 영락10년의 전쟁 이후 임나가라의 응신왕은 전쟁에 패배하고 일본열도로 도망가서 새로운 국가를 건립한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는 친고구려의 임나가라 정권이 세워진다.

전쟁이 끝나고 광개토왕릉비가 세워질 즈음 만백성과 수묘인들이 늘 쳐다보는 비문에 임나가라를 떠난 무리는 倭로 떠나지 않은 무리들은 韓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흔적이 후에 중국의 역사서인 [송서]와 [남제서]에 나타난다.
/// 인용 끝

저의 주장은 광개토대왕 비문에 표현되어 있는 倭라는 것의 실체는 임나가라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일본열도에 존재하는 倭가 한반도에서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전쟁은 [백잔(백제)과 임나가라(비문의 倭)] vs [고구려와 신라]의 한판 승부였다는데, 그 전쟁의 결과는 [고구려와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나고, 그 전쟁의 와중에 임나가라의 응신왕이 일본열도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그 도망간 무리를 비문에는 倭라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비문에 기록된 倭라는 것은 장수왕이 능비를 작성할 때 한반도를 떠나 倭가 되어있는 존재를 소급하여 기록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송서나 남제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舊土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그 것이 바로 6국 또는 7국 군정권을 요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족에 대해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분석한 글에서 군데군데 제 주장을 하였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지금의 대동강 유역(낙랑군)을 중심으로 그 북쪽을 맥족의 거주 영역으로 동북쪽(지금의 백두대간 동쪽)을 穢족의 거주지, 그리고 남쪽을 한의 고유영역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비문에 등장하는 穢 또한 동일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 언급된 동예는 穢와 한의 영역이 중첩되는 지금의 원산만 부근 지역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갈사왕의 동부여는 제가 아직,....



브리야트님 曰
두번째는 임나가라가 영역국가였다는 인식과 응신천왕의 출자를 가야로 기록한 부분입니다.. 님과 비슷한 견해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를 들수 있을것 같습니다...그러나 님의 견해는 우선 임나가야의 성격규명과 함께 영역국가로 불수 잇는 근거가 아직은 미흡해보입니다...이런 부분을 충족하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아직은 무리인듯,

livemiri 曰
제가 역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김성호박사의 [비류백제,...]를 읽고 난 이후입니다. 앞의 제 글들을 읽어보시면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분석을 통하여 변한12개국이 가야를 의미하며 그 들은 완전한 고대국가로 판단하고 있으며, 그들의 후손을 임나가라로 판단합니다. 저는 지역에 따라 다른 고고학적 유물이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다른 실체의 지방소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로 그러한 것이 전혀 다른 소국이라면 지금의 중국은 지역마다 민족마다 수 많은 소국으로 분리되었다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2~3세기 한반도에 수 많은 소국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고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잘못 이해한 것과 이를 통하여 잘못 이해한 고대상이 발굴되는 유물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브리야트님 曰
세번째는 종주권을 요구하는 부분은 일종에 뻥을 치는 외교이다는 견해에 더 비중을 두고 싶군요.....이부분은 언젠가 한번 자세히 다뤄보고 싶은 부분이나 아직내공이 쌓이지 않아 그러합니다....
약간만 말한다면, 당시 중국남조가 한반도나 구주지역에 이전 관구검침입후의 서진시기와는 달리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던시기에 그러합니다...

livemiri 曰
대체적으로 저도 그렇게 판단합니다.
왜5왕은 예전 자신들의 고토를 국제사회로부터 공인 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결국 加羅王荷知에게 돌아가자 그러한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입니다.



브리야트님 曰
네번째는 책봉되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그 책봉된것은 요즘 용어로 백작 공작하는 일종의 관작이므로 그 작위의 높고 낮음도 검토되었으면 합니다....

livemiri 曰
加羅王荷知는 輔國將軍 本國王을 제수 받습니다. 本國王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감사합니다.



/////////////// livemiri

브리야트님이 (2009-01-03 19:52:14)에 쓰신 글

두가지부분을 말하고 싶습니다...아니 둘 더해서 4가지입니다.

불가촉천민이라는 것보다는 이질적요소 이민족이라는 생각이 아닐까합니다.. 말갈이나 거란등은 없으니까요...

두번째는 임나가라가 영역국가였다는 인식과 응신천왕의 출자를 가야로 기록한 부분입니다.. 님과 비슷한 견해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를 들수 있을것 같습니다...그러나 님의 견해는 우선 임나가야의 성격규명과 함께 영역국가로 불수 잇는 근거가 아직은 미흡해보입니다...이런 부분을 충족하여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아직은 무리인듯,

세번째는 종주권을 요구하는 부분은 일종에 뻥을 치는 외교이다는 견해에 더 비중을 두고 싶군요.....이부분은 언젠가 한번 자세히 다뤄보고 싶은 부분이나 아직내공이 쌓이지 않아 그러합니다....
약간만 말한다면, 당시 중국남조가 한반도나 구주지역에 이전 관구검침입후의 서진시기와는 달리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수 없던시기에 그러합니다...

네번째는 책봉되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그 책봉된것은 요즘 용어로 백작 공작하는 일종의 관작이므로 그 작위의 높고 낮음도 검토되었으면 합니다....



브리야트님이 (2009-01-03 19:57:07)에 쓰신 글

불가촉천민이라는 것보다는 이질적요소 이민족이라는 생각이 아닐까합니다.. 말갈이나 거란등은 없으니까요... 이런한견해가 다소 현대적인 민족의식속의 안이한 판단일지도 모르나....비문의 기록으로 어느정도 이렇게 해석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고구려인 다음에 한,과 예를 말하니까요



그리고 예에 대하여 동부여...이것이 혹 위지동이전이 동예가 동부여로 연관된다는 인식인지 아니면, 모용황의 부여 공파이후 나온 갈사왕의 동부여로 그래서 예족이라 인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두 다 그러하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여하튼 저는 동예가 이후 동부여와 어떤식으로든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기에 저에게는 흥미로운 견해입니다....



서석 (2009-01-05 15:31:14)
livemiri님은 광개토왕 비문의 왜는 일본으로 떠난 임나가라이다고 결론을 내리시는데요.이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은 잘 아실 겁니다. 님의 글에서 모순이 있다고 보는 부분을 포함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서석===>
1.비문에는 임나가라와 왜가 같이 등장하는데 왜 명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요? 임나가라 종발성이 아니라 왜의 종발성이라고 해야지요.

2.님의 논리에 따라 임나가라가 일본으로 도주했다고 봅시다. 그럼 남정이후 영락14년에 대방계를 침공하는 왜는 도주했던 임나가라가 고구려 본토로 진격한 것입니까?

3.고구려+신라 연합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왜는 일본으로 도주했다는데 신라가 이 지역(임나가라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3번의 질문에 대해 잔여세력이 남아서 가야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고 해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는 보이지 않고 늘 왜와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광개토왕 남정이 있기전, 4세기대 기록에서 가야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라 봅니까?

6.송서나 남제서에서 6국 또는 7국의 군정권을 요구한건 구토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 하셨는데 중국이 요구대로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한반도 사정을 몰라서 그랬나요?

7.6번질문과 연장선에서 이어집니다. 구토(舊土)라면 백제,신라는 빼야 할 것인데 백제,신라를 포함시키고 중국에서도 신라를 포함시켜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행 (2009-01-05 15:52:37)
6군제군사는 아무튼 고구려 견제용인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남하 위협이 있자 한반도 남부에 대한 정통성을 사전에 중국에 알린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가 전부 지배해 버릴것을 대비해 미리 중국에 조공하고 나중에 중국의 지원을 받을 심산이었겠지요.
livemiri (2009-01-05 16:31:46)
서석님이 (2009-01-05 15:31:14)에 쓰신 글

livemiri님은 광개토왕 비문의 왜는 일본으로 떠난 임나가라이다고 결론을 내리시는데요.이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은 잘 아실 겁니다. 님의 글에서 모순이 있다고 보는 부분을 포함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서석===>
1.비문에는 임나가라와 왜가 같이 등장하는데 왜 명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요? 임나가라 종발성이 아니라 왜의 종발성이라고 해야지요.

2.님의 논리에 따라 임나가라가 일본으로 도주했다고 봅시다. 그럼 남정이후 영락14년에 대방계를 침공하는 왜는 도주했던 임나가라가 고구려 본토로 진격한 것입니까?

3.고구려+신라 연합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왜는 일본으로 도주했다는데 신라가 이 지역(임나가라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3번의 질문에 대해 잔여세력이 남아서 가야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고 해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는 보이지 않고 늘 왜와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광개토왕 남정이 있기전, 4세기대 기록에서 가야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라 봅니까?

6.송서나 남제서에서 6국 또는 7국의 군정권을 요구한건 구토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 하셨는데 중국이 요구대로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한반도 사정을 몰라서 그랬나요?

7.6번질문과 연장선에서 이어집니다. 구토(舊土)라면 백제,신라는 빼야 할 것인데 백제,신라를 포함시키고 중국에서도 신라를 포함시켜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 livemiri


서석님 曰
1.비문에는 임나가라와 왜가 같이 등장하는데 왜 명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요? 임나가라 종발성이 아니라 왜의 종발성이라고 해야지요.

livemiri 曰
임나가라는 지명이자 국명으로 파악되는 것에 반해, 왜는 국명이자 정치체로 파악됩니다. 그리고 사람이나 일정한 정치집단(?)은 떠나갈 수 있어도 지명이나 그에 상응하는 것은 떠나갈 수 없습니다. 고구려군이 영락 10년에 남정을 한 곳이 임나가라(지명)입니다. 전쟁을 하러 왜(일본열도)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비문의 기록에 ‘임나가라 종발성’을 ‘왜의 종발성’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이 ‘임나가라 종발성’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왜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석님 曰
2.님의 논리에 따라 임나가라가 일본으로 도주했다고 봅시다. 그럼 남정이후 영락14년에 대방계를 침공하는 왜는 도주했던 임나가라가 고구려 본토로 진격한 것입니까?

livemiri 曰
한국동란 때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으로 후퇴를 했습니다. 그 때 북으로 가지 않고, 지리산 등으로 들어가 빨지산이 된 인민군도 있었습니다.

영락14년의 상황도 비슷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영락10년 전쟁 이후 임나가라 내부는 의견이 분분하였을 것입니다. 일본열도로 도망가자는 부류와 굵고 짧게 살자며 일전을 불사하던 무리들도 같이 있었겠죠. 그 들이 바로 배를 타고 대방계를 공격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 그 들은 예전 자신의 선조들이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한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서석님 曰
3.고구려+신라 연합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왜는 일본으로 도주했다는데 신라가 이 지역(임나가라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 曰
백제와의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는 항복을 받아냅니다. 백제라는 나라를 없애버리고 지방관을 보내 통치하지 않았습니다. 임나가라도 마찬가지였다고 판단합니다.



서석님 曰
4.3번의 질문에 대해 잔여세력이 남아서 가야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고 해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는 보이지 않고 늘 왜와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 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가 보이지 않는 것과 늘 왜와 싸우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국가 간이나 또는 무장세력과 전쟁을 하는 이유야 아주 많겠지만, 그 근본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죠.



서석님 曰
5.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광개토왕 남정이 있기전, 4세기대 기록에서 가야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라 봅니까?

livemiri 曰
아직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서석님 曰
6.송서나 남제서에서 6국 또는 7국의 군정권을 요구한건 구토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 하셨는데 중국이 요구대로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한반도 사정을 몰라서 그랬나요?

7.6번질문과 연장선에서 이어집니다. 구토(舊土)라면 백제,신라는 빼야 할 것인데 백제,신라를 포함시키고 중국에서도 신라를 포함시켜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 曰
어쩌다 한 번씩 인터넷을 다니다 보면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고, 급기야 글들이 욕으로 도배되면서 서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는 현피를 뜨자.”는 식을 글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이라 자신의 익명성이 무기가 되어 허풍을 치는거죠.

각설하고,..
저는 왜의 6군 또는 7군 군정권을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현해탄이라는 거대한 자연방어물이 있습니다. 왜5왕들은 그 것을 잘 이용한 것이죠. 큰 소리 빵빵 쳐도 한반도에서 당장 쳐들어올 일이 없으니,....

그리고 6군 또는 7군 군정권 문제는 구토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의 독도영유권문제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임나가라 하나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대하여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삼국지에 기록된 韓의 영역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6군 또는 7군 군정권 문제는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하여 一統三韓이 이루어진 후에야 완전하게 청산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석 (2009-01-05 17:05:30)
답변 감사합니다. 하지만 설득력있는 답변은 없었다고 감히 평합니다. 시간관계상 1번 질문의 답변에 대한 평가입니다.

1번 질문에 대한 답변은 광개토왕 비문의 사료적 가치를 격하시키는 평가입니다. 고구려인이 불과 몇 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백제,신라가 과거 속국이었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광개토왕 남정전에 신라국경에서 신라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님의 논리대로라면 분명히 임나가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 왜라는 국가가 갑자기 건국했습니까? 아니지요. 왜는 기원전부터 열도인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기원후에도 왜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등장합니다.

신라를 괴롭히는 임나가라인을 왜 왜인으로 불러줄까요? 아직 왜인이 되지 않았는데?
백제인이 후에 일본으로 갔다면 가기 전의 백제인도 왜인으로 부를까요? 말이 안 됩니다. 왕의 훈적을 기록하는 비문에 그런 식으로 기록할 리가 없습니다.

애초 신라 사신이 구원요청하러 왔을때부터 봅시다.
<임나가라인이 국경에 가득차 성과 해자를 파괴하고 있으니 왕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신라의 국경밖에는 원래 임나가라인이 살고 있는데 새삼스레 가득차다니 말이 됩니까?

다른 답변은 시간이 나면 다시 보겠습니다.
서석 (2009-01-05 17:24:51)
2번 답변-패잔병들이 본토진격을 꿈꾸는 것도 우습지만 패잔병을 상대로 왕이 직접 군대를 몰고 상대하러 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3번 질문-고구려+신라 연합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왜는 일본으로 도주했다는데 신라가 이 지역(임나가라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님 답변
백제와의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는 항복을 받아냅니다. 백제라는 나라를 없애버리고 지방관을 보내 통치하지 않았습니다. 임나가라도 마찬가지였다고 판단합니다.

서석==>바다를 건너가서 왕조를 세운 임나가라인? 남아 있는 임나가라인?
그럼 애초 임나가라가 바다건너 도피할 이유가 없었던것 아닙니까? 백제왕이 고구려에 무참히 깨지고 포로와 베를 바쳤지만 살려 주니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백제인에 비해 임나가라인은 왜 일부는 남아 있고 일부는 도망갑니까? 갔다가도 전원 돌아오는게 상식 아닌가요? 산설고 물설은 객지보다 고향이 백배 낫지요.
진행 (2009-01-05 17:25:11)
저는 임나가야는 당시에는 '왜'로 인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신라한테는요.
서석 (2009-01-05 17:30:26)
4.3번의 질문에 대해 잔여세력이 남아서 가야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고 해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는 보이지 않고 늘 왜와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 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가 보이지 않는 것과 늘 왜와 싸우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국가 간이나 또는 무장세력과 전쟁을 하는 이유야 아주 많겠지만, 그 근본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죠.

서석==>역시 역사기록을 우습게 보는 답변입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대국가간에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어찌 250년씩 안 보일 수 있습니까? 고구려,백제 등 다른 나라는 그런 경우가 없었지 않습니까?
서석 (2009-01-05 17:41:58)
6.송서나 남제서에서 6국 또는 7국의 군정권을 요구한건 구토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 하셨는데 중국이 요구대로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한반도 사정을 몰라서 그랬나요?

7.6번질문과 연장선에서 이어집니다. 구토(舊土)라면 백제,신라는 빼야 할 것인데 백제,신라를 포함시키고 중국에서도 신라를 포함시켜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 曰
어쩌다 한 번씩 인터넷을 다니다 보면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고, 급기야 글들이 욕으로 도배되면서 서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는 현피를 뜨자.”는 식을 글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이라 자신의 익명성이 무기가 되어 허풍을 치는거죠.

각설하고,..
저는 왜의 6군 또는 7군 군정권을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현해탄이라는 거대한 자연방어물이 있습니다. 왜5왕들은 그 것을 잘 이용한 것이죠. 큰 소리 빵빵 쳐도 한반도에서 당장 쳐들어올 일이 없으니,....

그리고 6군 또는 7군 군정권 문제는 구토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의 독도영유권문제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임나가라 하나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대하여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삼국지에 기록된 韓의 영역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서석===>송서나 남제서는 중국 정사입니다. 그리고 이건 황실에서 작위를 내린 기사입니다. 바다건너 사정도 모르고, 더 멀리서 온 허풍쟁이가 요구하는 대로 작위를 줄리가 있습니까? 백제를 뺀 것은 백제가 중국에 사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나 다른 소국은 중국에 사절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5세기대 중국 남조에서 한반도나 일본 열도의 사정을 그렇게 모른다는게 말이 됩니까? 멀리 서역의 사정도 환히 파악하고 있었는데요. 아무나 가서 허풍만 치면 거창한 작위를 하나씩 줍니까? 피해당사자들이 항의하면 어쩔건데요.
livemiri (2009-01-05 18:52:14)
서석님이 (2009-01-05 17:05:30)에 쓰신 글

답변 감사합니다. 하지만 설득력있는 답변은 없었다고 감히 평합니다. 시간관계상 1번 질문의 답변에 대한 평가입니다.

1번 질문에 대한 답변은 광개토왕 비문의 사료적 가치를 격하시키는 평가입니다. 고구려인이 불과 몇 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백제,신라가 과거 속국이었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요.

광개토왕 남정전에 신라국경에서 신라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님의 논리대로라면 분명히 임나가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 왜라는 국가가 갑자기 건국했습니까? 아니지요. 왜는 기원전부터 열도인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기원후에도 왜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등장합니다.

신라를 괴롭히는 임나가라인을 왜 왜인으로 불러줄까요? 아직 왜인이 되지 않았는데?
백제인이 후에 일본으로 갔다면 가기 전의 백제인도 왜인으로 부를까요? 말이 안 됩니다. 왕의 훈적을 기록하는 비문에 그런 식으로 기록할 리가 없습니다.

애초 신라 사신이 구원요청하러 왔을때부터 봅시다.
<임나가라인이 국경에 가득차 성과 해자를 파괴하고 있으니 왕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신라의 국경밖에는 원래 임나가라인이 살고 있는데 새삼스레 가득차다니 말이 됩니까?

다른 답변은 시간이 나면 다시 보겠습니다.



/////////////// livemiri

전쟁의 혼란기입니다. 전쟁 중에는 군인도 있고, 피난가는 민간인도 있습니다. 신라국경에 가득 찬 사람들이 바로 임나가라인들 입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여 그 전과는 다른 왜(응신조)를 세웁니다.
그들이 어떻게 일본열도를 정복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송서의 기록입니다.
順帝升明二年(서기 478년),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於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鹹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武가 할아버지 때부터 일본열도를 정복했다고 하고, 고구려, 백제가 두렵다고 합니다.
///miri




서석님이 (2009-01-05 17:24:51)에 쓰신 글

2번 답변-패잔병들이 본토진격을 꿈꾸는 것도 우습지만 패잔병을 상대로 왕이 직접 군대를 몰고 상대하러 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3번 질문-고구려+신라 연합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왜는 일본으로 도주했다는데 신라가 이 지역(임나가라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님 답변
백제와의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는 항복을 받아냅니다. 백제라는 나라를 없애버리고 지방관을 보내 통치하지 않았습니다. 임나가라도 마찬가지였다고 판단합니다.

서석==>바다를 건너가서 왕조를 세운 임나가라인? 남아 있는 임나가라인?
그럼 애초 임나가라가 바다건너 도피할 이유가 없었던것 아닙니까? 백제왕이 고구려에 무참히 깨지고 포로와 베를 바쳤지만 살려 주니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백제인에 비해 임나가라인은 왜 일부는 남아 있고 일부는 도망갑니까? 갔다가도 전원 돌아오는게 상식 아닌가요? 산설고 물설은 객지보다 고향이 백배 낫지요.


/////////////// livemiri

전쟁 영화를 한 번 씩 보면 쟁의 상황이 지역이나 시간에 따라 양상이 무척 다릅니다. 국부적으로 동일한 시간에 a지역에서 아군이 박살나고 있는데, b지역에서는 아군이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전쟁의 승패를 이해해야합니다. 대방계를 침입한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선조들도 일제시대 때 독립 운동을 하였죠. 그 때 일본과 전쟁을 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한 사람도 있고, 임시정부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사람도 있으며, 제3국으로 나간 새로운 삶을 산 사람들(예 조선족)도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 임나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전쟁은 사람의 삶을 너무나 다르게 바꾸어버리기 때문에 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miri



서석님이 (2009-01-05 17:30:26)에 쓰신 글

4.3번의 질문에 대해 잔여세력이 남아서 가야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고 해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는 보이지 않고 늘 왜와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 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가 보이지 않는 것과 늘 왜와 싸우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국가 간이나 또는 무장세력과 전쟁을 하는 이유야 아주 많겠지만, 그 근본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죠.

서석==>역시 역사기록을 우습게 보는 답변입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대국가간에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어찌 250년씩 안 보일 수 있습니까? 고구려,백제 등 다른 나라는 그런 경우가 없었지 않습니까?


/////////////// livemiri
역사 기록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고, 역사서에 기록이 안 보이는 것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관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이유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을까를 살피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가야가 보이지 않는 것”과 “신라가 늘 왜와 싸우는 것”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miri



서석님이 (2009-01-05 17:41:58)에 쓰신 글

6.송서나 남제서에서 6국 또는 7국의 군정권을 요구한건 구토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 하셨는데 중국이 요구대로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한반도 사정을 몰라서 그랬나요?

7.6번질문과 연장선에서 이어집니다. 구토(舊土)라면 백제,신라는 빼야 할 것인데 백제,신라를 포함시키고 중국에서도 신라를 포함시켜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livemiri 曰
어쩌다 한 번씩 인터넷을 다니다 보면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고, 급기야 글들이 욕으로 도배되면서 서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는 현피를 뜨자.”는 식을 글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이라 자신의 익명성이 무기가 되어 허풍을 치는거죠.

각설하고,..
저는 왜의 6군 또는 7군 군정권을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현해탄이라는 거대한 자연방어물이 있습니다. 왜5왕들은 그 것을 잘 이용한 것이죠. 큰 소리 빵빵 쳐도 한반도에서 당장 쳐들어올 일이 없으니,....

그리고 6군 또는 7군 군정권 문제는 구토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의 독도영유권문제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임나가라 하나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대하여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삼국지에 기록된 韓의 영역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서석===>송서나 남제서는 중국 정사입니다. 그리고 이건 황실에서 작위를 내린 기사입니다. 바다건너 사정도 모르고, 더 멀리서 온 허풍쟁이가 요구하는 대로 작위를 줄리가 있습니까? 백제를 뺀 것은 백제가 중국에 사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나 다른 소국은 중국에 사절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5세기대 중국 남조에서 한반도나 일본 열도의 사정을 그렇게 모른다는게 말이 됩니까? 멀리 서역의 사정도 환히 파악하고 있었는데요. 아무나 가서 허풍만 치면 거창한 작위를 하나씩 줍니까? 피해당사자들이 항의하면 어쩔건데요.

/////////////// livemiri
위에 송서의 기록을 하나 보여드렸습니다. 武는 백제가 두려웠나 봅니다. 그래서 작위에서 백제를 뺍니다. 허기사 바다 건너에서 “메롱 메롱”하고 있는데, 그냥 쥐어박을 수도 없고, 신라는 속이 좀 답답했더라도 참았을 것입니다.
///miri


감사합니다.
브리야트 (2009-01-05 19:26:58)
라이브님///
답변에 감사합니다.... 제가 질의한부분은 님이 설명하는 논리에 있어 부족한 부분으로 이해하셨으며 하고요...

위 댓글중에 기원전부터 왜로 불려졌다 하는 부분이 어디에 나오는지(광무제 시기전의 중국기록이외에 더 앞선 기록이 있나 궁금함)..중국등 다른나라에서는 왜라는 명칭이 보이는데....왜 스스로 왜로 칭한것은 언제일까요???
브리야트 (2009-01-05 19:39:46)
대방계는 불과 새로운 영지로 획득한지 10여년 된 고구려의 영지이니...그곳에서 군사작전을 추진한 세력은 실질적으로 백제로 봐야 하고 이역시 10년조 기사에서 분명이 백제와 화통한...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이지역에 왜가 나타나 침략하는것은 불과 10년전 백제가 상실한 영역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6년10년의 고구려공세에 14년에 절치부심하던 백제가 반격에 나선것으로 해석하면 자연스러운 해석이죠....14년조의 대방계는 고구려의 오래된 영지로 보는 뉘앙스는 좀 그렇구요..
왕당...광개토왕 직속군이 대방계에 보내어 왜군을 대파한다는 부분역시....왕이 친정하였다는 부분은 없는데...비문설립목적이 광개토왕을 찬양하는 것이니....지방군이 초전에 방어를 하였을것이고 응원군으로 온 중앙군인 광개토왕의 직속군의 업적을 찬양하는것은 당연한 일이죠...왜가 대단해서가 아니죠....
livemiri (2009-01-05 19:41:19)
브리야트님이 (2009-01-05 19:26:58)에 쓰신 글

라이브님///
답변에 감사합니다.... 제가 질의한부분은 님이 설명하는 논리에 있어 부족한 부분으로 이해하셨으며 하고요...

위 댓글중에 기원전부터 왜로 불려졌다 하는 부분이 어디에 나오는지(광무제 시기전의 중국기록이외에 더 앞선 기록이 있나 궁금함)..중국등 다른나라에서는 왜라는 명칭이 보이는데....왜 스스로 왜로 칭한것은 언제일까요???

/////////////// livemiri

“기원전부터 왜로 불려졌다.”하는 부분은 서석님의 글입니다.

서석님은 아마 산해경의 기록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왜 스스로 왜로 칭한 것은 응신 망명이후 중국 남조에 군정권을 요구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후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한 삼한일통이 이루어지고 난 후 그들은 일본으로 이름을 바꾸죠.

지금은 바빠 다른 답글은 천천히 읽어보고 달겠습니다.
그리고, 제 필명은 livemiri입니다.
감사합니다.
브리야트 (2009-01-05 19:53:15)
저는 후한서에서 전하는 광무제시기의 사신을 보낸기록이 가장 앞선시기로 알고 있어 질의 한것입니다.....혹 다른것이 잇나해서요....산해경을 찾아봐야 겠군요....

그리고 필명을 제마음대로 편집한것은 양해구합니다..편의상하였는데 상한마음이라면 사과드리고 정식으로 호칭하겠습니다...
브리야트 (2009-01-05 20:34:41)
후한서에 한무제이래로 30여국의 왜와 한이 교류하였다는 기록도 나오고 있으나..이걸로 기원전은 무리인것 같군요.....이것은 이후의 저의 글로 말씀드려볼 생각입니다...
브리야트 (2009-01-05 22:40:43)
위 댓글중에 비문14년의 대방계 방어에 나선 왕당...이라는 광개토왕의 직속군은...구귀족의 영지가 아니라...새로이 편입된 영역이라면....당연이 왕의 직할영지이거나 왕의 친위세력의 영지가 될 가능성이 더 높으니...왕당이 나서는 것은 당연해 보이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