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몇가지 질문(2003)

livemiri 2010. 3. 26. 01:07
livemiri(2003-03-03 01:42:18, Hit : 221, Vote : 12)
여름/몇가지 질문

4말 5초 이전에 대해 한쪽에서는 <<일본서기>> 기록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라고 합니다. 물론 고고학적 증거가 우선합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열도의 특징적 유물, 유적이라 할만한 것이 당시 한반도 남부 유물에서 보이지 않는데 기록만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은 일본측에서도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고고학 자료만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일본서기>> 기록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뭔가 근거가 있었으니까 그런 기록이 남았겠죠.

livemiri ==> 여름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저는 '한반도 왜'를 주장합니다만 전남 나주를 왜의 근거지(최소한 중심지)로 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는 기원 이전부터 원래 한반도에 왜가 있었는데 이 왜가 일본열도로 갔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 왜가 있었다고 봅니다. 야요이인들, 고분인들의 형질이 현대 한국인과 같고 현대 일본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여러 방법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이 말은 한반도 남부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형질이 별로 없어서 고대 한반도 남부인들이나 현대 한국인들이 거의 같은 형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일본열도에서는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간 사람들과 아이누인들의 혼혈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의 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는 몇 년 전 상고사 게시판부터 한반도 왜를 임나로 보았고 근거지는 낙동강 동쪽으로 보았습니다. 낙동강 서쪽에는 수로왕의 가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임나의 북쪽 경계는 박정아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수용하여 태화강까지로 잡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livemiri ==> 예전 상고사학회에서 김상이라는 필명을 쓰는 분에게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倭人 倭國 倭兵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비교하면서 읽어 보라고 제안을 하였더니, 며칠 뒤에 일본서기의 기년을 다 복원하였다며 새로운 글이 올라온 것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 즈음 그 분의 할머니가 돌아 가신 것으로 압니다.(다시 한번 조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그 기년이라는 것이 김성호박사의 책을 보고 적었더라구요. 지마8년(119)=숭신 말년, 지마9년(120)=수인 원년^^ 이런식 으로 ....김성호박사의 가설이 한반도의 왜는 부산임나지요.


이처럼 기원전후부터 가야 기록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3세기 초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수로왕 가야, 倭(임나), 신라가 나란히 있었고 그 경계는 대략 각각 낙동강과 태화강이었습니다. 더우기 놀랍게도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가 이 기간 중에는 예외 없이 '倭人'으로 표기되어 나오는 것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야 기록이 갑자기 안 나오는 3세기 초부터 약 200년 동안은 <신라본기>에서 倭의 표기 방식도 '倭人'이 아니고 갑자기 '倭國'으로 바뀌더란 말이죠.이것은 가야가 倭國으로 대치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저는 이를 낙동강 동쪽의 '倭人'(임나)이 수로왕 가야를 접수하여 낙동강 하루 유역 전체가 신라인들에게 '倭國'으로 인식되었다고 해석합니다.(해석이야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신라본기> 왜 표기 방식이 倭人-倭國-倭人으로 수백 년에 걸쳐 변한다는 통계적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livemiri ==> '倭人'(임나)이 수로왕 가야를 접수하여 낙동강 하루 유역 전체가 신라인들에게 '倭國'으로 인식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수로왕의 가야가 멸망했다는 표현같군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임나 지역의 왜가 가야 지역까지 석권하였으므로 결국 3세기 이후로는 왜=가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석우로를 태워 죽이고, 신라에 혼인을 청했다가 거절 당하자 군사를 일으키고, 백제가 전지를 신라가 미사흔을 인질로 보낸 왜가 바로 200년 동안 어느 역사책에도 기록에 안 나온다고 생각한 가야입니다. 수로왕 가야와 광개토 대왕 남정 이후의 금관 가야 사이에 있는, 학계에서 말하는 '전기 가야'입니다.

livemiri ==>수로왕 가야와 광개토 대왕 남정 이후의 금관 가야 사이에 있는, 학계에서 말하는 '전기 가야'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님의 글을 읽어보면 숭신 수인등의 일본천황이 지금의 울산에서 부산 사이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어감이 드는데,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건화랑세기 이야기인데요, 수로왕 가야와 광개토 대왕 남정 이후의 금관 가야 사이에 공백이 있다면 화랑세기에 기록된 가야 왕력은 몬지. 여기에 계신 많은 분들의 생각(?) 속의 짱=[화랑세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쓰레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어서요.


전기 가야, 즉 왜가 광개토왕한테 패하고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많이들 간다는 말이죠.(5세기 들어 나타나는 일본 고분 문화의 변화) <<일본서기>>에는 당시 건너간 가야인들의 기록이나 기억이 포함되었던 걸로 봅니다. 한반도에 있을 당시 신라의 석우로를 태워 죽인 것, 백제와 신라에서 인질 보낸 것 등이 있죠.
<<일보서기>>에 나오는 임나 사람 이름인 '소나갈질지'와 석우로와 만난 왜국 사신 '갈나고'가 뭔지 비슷한 것 같고(동일이라는 것이 아니고 작명법이 비슷하다는 이야기), 왜병들이 석우로를 태워 죽이는 것과 왜왕이 박제상을 태워 죽이는 형벌도 같고... 뭐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livemiri ==>소나갈질지, 갈나고 등의 인명표기 방식에 대한 미세한 차이를 아주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것 같군요. 신라시대 금석문에도 [지]가 이름 뒤에 붙어 있는데 ....


(1) 그러면 왜 가야가 倭로 신라인들에게 인식이 되엇을까요?
-> 당연히 가야가 <신라본기>에 기원전 50년부터 나오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倭人들에게 3세기 초 멸망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倭人이 바로 낙동강과 태화강 사이에 있었던 임나입니다.

livemiri ==>신라본기를 보면 낙랑 화려 불내 등의 기록이 있는데, 박혁거세거서간은 어디에서 신라를 건국했다고 보시는지요.


(2) 그러면 왜 한반도 남부 일부(임나)는 倭로 불리었을까요?
-> <<삼국지>>와 <<후한서>>를 쓴 사람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자기드로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 이전부터 그렇게 불리었으므로.

livemiri ==>몇쪽 앞의 글을 읽어보시면 <<삼국지>>의 왜에 대하여신공을 찾아가는 대방관리들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이해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제가 보건데는 <<삼국지>>의 왜는 지금의 일본 열도에 있더라구요. 그 것도 지금의 큐슈에 있어야 이야기가 맞아들어 가더라구요. 저는 진실을 알고 싶어 드리는 글이니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나머지 글들은 다음에 질문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집주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07-26 09:04)



여름 (2003-03-03 06:53:30)
<<화랑세기>>에 나오는 가야 왕력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야 왕력과 같은 걸로 압니다. 물론 이시품왕과 좌지왕 사이가 실제로는 200년 정도 떨어졌는데 그것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것입니다.
숭신과 수인이 한반도 남부레 있었다는 말씀은 드린 적이 없습니다. 소나갈질지와 갈나고는 '갈' 자가 같아서 한번 생각해본 것이므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올린 논문을 읽어보시면 대부분 해소될 질문들로 생각하므로 자세한 답변은 생략합니다.
서석 (2003-03-03 12:32:20)
화랑세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쓰레기라고요?
화랑세기하고 무슨 원수진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김대문이나 박창화하고?

화랑세기를 짱이라고 한 사람 본 적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신라인이 쓴 글이라고 생각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문천(김태식)님은 오랫동안 연구해서 화랑세기가 진본임을 주장하는 책을 냈습니다. 대중적인 역사관련글을 많이 쓰는 이덕일교수도 화랑세기를 진본으로 가정하고 신문잡지등에 많은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 3년 연구해서 40쪽 가량 글을 써놓고 있고 그 동안 이곳에서 계속 선을 보였습니다. 검색해 보시고 한 구절이라도 반론을 펴 보시기 바랍니다.

미리님은 화랑세기가 쓰레기라는 근거를 얼마나 찾아냈습니까? 보고 싶습니다. 제가 글을 올릴때 댓글조차 한번 올린 적이 없었지요. 그런걸 보여주지 않고 쓰레기라 강변한다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모르십니까? 책임은 무슨 책임이냐고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인 요시미즈 츠네오가 30년간 연구해서 신라유물이 로마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의 <로마문화왕국, 신라>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걸 대충 훑어보고 "말도 안되는 소리" 이렇게 일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내뱉은 한마디가 30년간 연구결과와 동격의 가치를 가진다고 착각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분노합니다.
근대인 (2003-03-03 12:41:53)
^^ 서석님 남을 의존하시는군요.
그럼 수십에서 수백년간 연구되어진다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인가요?

삼십년간 연구해서 신라유물이 로마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한가지 주장했군요.

10년연구해서 전 삼국의 역사를 바꾸어버리는 행위를 어떻게 보십니까? 신라인들이 가야를 점령하여 倭人들이라 불렀으며, 신라와 倭가 내륙에서 대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30년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서석 (2003-03-03 13:10:36)
근대인님! 내말이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이 힘들게 연구해서 어떤 사실을 발표하면 반론을 펴는 사람은 최소한 그와 비슷하게는 못해도 어느 정도 힘을 들여야 반론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간단하게 단정하면 말은 편하지만 그 만한 무게는 못되는 겁니다.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란 거지요.
방문자 (2003-03-03 16:13:56)
미리님께서 상당히 심하셨군요.
화랑세기를 쓰레기라고 한마디로 일소에 붙일만큼 그 동안에 개인적으로 화랑세기에 대해 연구하신 것 있으면 한번 제시해 보시죠. 여름님 글에 대한 질문도 그 동안 게시판을 꾸준히 읽어오셨든지 여름님 논문을 한번이라도 정독했다면 나올 수 없는 한심한 질문들입니다.
궁금이 (2003-03-03 16:28:30)
다른건 몰라도 근거를 대지않고(혹은 정당한 반론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그건 틀렸어, 그건 쓰레기야 라고만 말하는건 오만입니다 대체 자기생각에 아니라고 생각되니 그냥 그건 아니야 라고 할 수 있는 자신감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틀렸다면, 아니라면, 그리고 쓰레기라고 한다면 왜??? 그런지 근거와 반박, 자료를 들이대지 않고 단지 말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묵살할 수는 없음입니다

이건 화랑세기가 진본이냐 아니냐와는 차원이 다른 기본 자세의 문제입니다 아무 근거 자료와 반대자료를 내놓지 않고 그건 아니야 라고 말하는 자체가 문제라는거죠 옳고 그름은 자신의 자료를 내놓고 토론하는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전지전능도 아니신데 한마디로 그건 쓰레기야 라고 말하시는 그 근거가 궁금하군요
서석 (2003-03-03 17:53:38)
그렇지요. 화랑세기를 쓰레기라 하면 우리는 쓰레기통 뒤지는 들쥐? 열받지 않을 사람 있나요?
역사탐정Y (2003-03-03 19:22:52)
livemiri님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스타일입니다.

위 글을 쓴 livemiri님의 요지는 기원 이전부터 원래 한반도에 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여름님이 왜에 관한 <신라본기>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낙동강 동쪽의 '倭人'(임나)이 수로왕 가야를 접수하여 낙동강 하류 유역 전체가 신라인들에게 '倭國'으로 인식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화랑세기에 기록된 가야 왕력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려는 것이 그만 자신의 속내를 부주의하게 드러낸 것이 분명합니다. 화랑세기를 주제로 놓고 그랬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다른 사람들이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것이 의연한 태도가 아닐까요.

livemiri님의 한마디로 화랑세기가 쓰레기로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