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말 5초 이전에 대해 한쪽에서는 <<일본서기>> 기록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라고 합니다. 물론 고고학적 증거가 우선합니다.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열도의 특징적 유물, 유적이라 할만한 것이 당시 한반도 남부 유물에서 보이지 않는데 기록만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은 일본측에서도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고고학 자료만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일본서기>> 기록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뭔가 근거가 있었으니까 그런 기록이 남았겠죠. livemiri ==> 여름님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저는 '한반도 왜'를 주장합니다만 전남 나주를 왜의 근거지(최소한 중심지)로 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저는 기원 이전부터 원래 한반도에 왜가 있었는데 이 왜가 일본열도로 갔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에 왜가 있었다고 봅니다. 야요이인들, 고분인들의 형질이 현대 한국인과 같고 현대 일본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이 여러 방법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이 말은 한반도 남부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형질이 별로 없어서 고대 한반도 남부인들이나 현대 한국인들이 거의 같은 형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일본열도에서는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간 사람들과 아이누인들의 혼혈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의 왜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는 몇 년 전 상고사 게시판부터 한반도 왜를 임나로 보았고 근거지는 낙동강 동쪽으로 보았습니다. 낙동강 서쪽에는 수로왕의 가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임나의 북쪽 경계는 박정아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수용하여 태화강까지로 잡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livemiri ==> 예전 상고사학회에서 김상이라는 필명을 쓰는 분에게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倭人 倭國 倭兵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비교하면서 읽어 보라고 제안을 하였더니, 며칠 뒤에 일본서기의 기년을 다 복원하였다며 새로운 글이 올라온 것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그 즈음 그 분의 할머니가 돌아 가신 것으로 압니다.(다시 한번 조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그 기년이라는 것이 김성호박사의 책을 보고 적었더라구요. 지마8년(119)=숭신 말년, 지마9년(120)=수인 원년^^ 이런식 으로 ....김성호박사의 가설이 한반도의 왜는 부산임나지요. 이처럼 기원전후부터 가야 기록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3세기 초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수로왕 가야, 倭(임나), 신라가 나란히 있었고 그 경계는 대략 각각 낙동강과 태화강이었습니다. 더우기 놀랍게도 <신라본기>에 나오는 倭가 이 기간 중에는 예외 없이 '倭人'으로 표기되어 나오는 것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야 기록이 갑자기 안 나오는 3세기 초부터 약 200년 동안은 <신라본기>에서 倭의 표기 방식도 '倭人'이 아니고 갑자기 '倭國'으로 바뀌더란 말이죠.이것은 가야가 倭國으로 대치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저는 이를 낙동강 동쪽의 '倭人'(임나)이 수로왕 가야를 접수하여 낙동강 하루 유역 전체가 신라인들에게 '倭國'으로 인식되었다고 해석합니다.(해석이야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신라본기> 왜 표기 방식이 倭人-倭國-倭人으로 수백 년에 걸쳐 변한다는 통계적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livemiri ==> '倭人'(임나)이 수로왕 가야를 접수하여 낙동강 하루 유역 전체가 신라인들에게 '倭國'으로 인식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수로왕의 가야가 멸망했다는 표현같군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임나 지역의 왜가 가야 지역까지 석권하였으므로 결국 3세기 이후로는 왜=가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석우로를 태워 죽이고, 신라에 혼인을 청했다가 거절 당하자 군사를 일으키고, 백제가 전지를 신라가 미사흔을 인질로 보낸 왜가 바로 200년 동안 어느 역사책에도 기록에 안 나온다고 생각한 가야입니다. 수로왕 가야와 광개토 대왕 남정 이후의 금관 가야 사이에 있는, 학계에서 말하는 '전기 가야'입니다.
livemiri ==>수로왕 가야와 광개토 대왕 남정 이후의 금관 가야 사이에 있는, 학계에서 말하는 '전기 가야'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님의 글을 읽어보면 숭신 수인등의 일본천황이 지금의 울산에서 부산 사이에서 왕노릇을 했다는 어감이 드는데,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건화랑세기 이야기인데요, 수로왕 가야와 광개토 대왕 남정 이후의 금관 가야 사이에 공백이 있다면 화랑세기에 기록된 가야 왕력은 몬지. 여기에 계신 많은 분들의 생각(?) 속의 짱=[화랑세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쓰레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어서요. 전기 가야, 즉 왜가 광개토왕한테 패하고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많이들 간다는 말이죠.(5세기 들어 나타나는 일본 고분 문화의 변화) <<일본서기>>에는 당시 건너간 가야인들의 기록이나 기억이 포함되었던 걸로 봅니다. 한반도에 있을 당시 신라의 석우로를 태워 죽인 것, 백제와 신라에서 인질 보낸 것 등이 있죠. <<일보서기>>에 나오는 임나 사람 이름인 '소나갈질지'와 석우로와 만난 왜국 사신 '갈나고'가 뭔지 비슷한 것 같고(동일이라는 것이 아니고 작명법이 비슷하다는 이야기), 왜병들이 석우로를 태워 죽이는 것과 왜왕이 박제상을 태워 죽이는 형벌도 같고... 뭐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livemiri ==>소나갈질지, 갈나고 등의 인명표기 방식에 대한 미세한 차이를 아주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것 같군요. 신라시대 금석문에도 [지]가 이름 뒤에 붙어 있는데 .... (1) 그러면 왜 가야가 倭로 신라인들에게 인식이 되엇을까요? -> 당연히 가야가 <신라본기>에 기원전 50년부터 나오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倭人들에게 3세기 초 멸망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倭人이 바로 낙동강과 태화강 사이에 있었던 임나입니다.
livemiri ==>신라본기를 보면 낙랑 화려 불내 등의 기록이 있는데, 박혁거세거서간은 어디에서 신라를 건국했다고 보시는지요. (2) 그러면 왜 한반도 남부 일부(임나)는 倭로 불리었을까요? -> <<삼국지>>와 <<후한서>>를 쓴 사람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자기드로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 이전부터 그렇게 불리었으므로.
livemiri ==>몇쪽 앞의 글을 읽어보시면 <<삼국지>>의 왜에 대하여신공을 찾아가는 대방관리들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이해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제가 보건데는 <<삼국지>>의 왜는 지금의 일본 열도에 있더라구요. 그 것도 지금의 큐슈에 있어야 이야기가 맞아들어 가더라구요. 저는 진실을 알고 싶어 드리는 글이니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나머지 글들은 다음에 질문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집주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07-26 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