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徙夫知王과 麗德光妙한 於史鄒安郎
livemiri
2012. 3. 22. 02:26
徙夫知王과 麗德光妙한 於史鄒安郎
삼국사기를 보면 법흥왕의 죽음을 ‘二十七年, 秋七月, 王薨’이라고 알리고 있다. 그 후 진흥왕이 왕위를 잇는데 기록에는 ‘<眞興王>立. 諱<彡麥宗>[或作<深麥夫>.],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라고 되어 있다.
또 하나의 기록을 보자. 己未年(539년, 법흥왕 26년)七月三日興王与妹共見書石叱見來谷此時共三來 另卽知太王妃夫乞支妃徙夫知王子郎深▨夫知共來 // 蔚州川前里刻石-追銘
己未年 7월 3일 대낮에 왕은 太王妃 夫乞支妃와 徙夫知王子郎 深▨夫知를 데리고 지금의 ‘울주군 천전리’를 다녀왔다. 기록에 共三來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왕(另卽知太王, 법흥왕)과 태왕비 그리고 深▨夫知이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울주군 천전리’를 다녀왔을까?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另卽知太王은 재위 27년에 薨한 것으로 되어 있어, 아마 老軀를 이끌고 힘들게 갔다 왔을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법흥왕은 지증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데 지증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가 64세이고 그가 15년간을 재위에 있었으니 智證王의 元子인 법흥왕도 말년의 적은 나이는 아니었을 것이다.하여튼,...
법흥왕은 그 해 분명히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그 곳에 가지 않았을까?
乙巳▨의 어느 날 아침 일찍 해가 뜨기 전 일단의 무리들이 지금의 ‘울주군 천전리’에 있는 이름 없는 계곡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 글을 적어 남기면서 그들은 그 곳에 다가 ‘書石谷’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바로 그 곳에 처음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어떤 연구자는 그 곳이 제의(祭儀)를 행한 장소로 파악하고 있는데 아마 처음부터는 제의를 행한 장소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곳에 동행한 사람들을 보면 食多煞作功人, 作食人, 作書人 등이 있는데, ‘人’자가 보인다.(다음에 한번 더,..) 煞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져온 가축을 도축하였거나, 아니면 사냥 등을 하여 식재료를 충원했을 사람으로 보이며,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作食人)도 보이고 造書를 한 作書人이 보인다.
그들은 왜 그 곳에 갔을까?
기록을 보자. 乙巳▨(525년, 법흥왕 12년)沙喙部葛文王覓遊來始淂見谷▨之古谷无名谷善石淂造書Z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麗德光妙於史鄒安郎三之 // 蔚州川前里刻石-原銘
乙巳▨(525년, 법흥왕 12년) 沙喙部葛文王이 어쩌구 저꺼구,,.... . . 함께 놀러 友妹(친구 같은 妹)와 麗德光妙한 於史鄒安郎 셋이 (왔다).
아하!!! 沙喙部葛文王이 자신의 妹와 그리고 이쁘고 아름다운 행실이 빛처럼 막 뿜어져 나오니 그 광채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於史鄒安郎과 같이 갔군여. (참고 : 安를 女로 판독하여 徙夫知王子郎의 子郎과 비교하여 따님 아드님으로 보는 연구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저는 安이나 女냐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법흥왕의 딸이니 女에 기울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적 있잖아요. 뭐 첫사랑을 만났을 때라든지... 저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살다보니 환상은 다 사라지더라구여. 아마 그 때 沙喙部葛文王도 그러지 않았을까?,... ㅋ
그리고 그 乙巳▨의 어느 날은 신라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날이었다. 그 날이나 그 가까운 시기에 於史鄒安郎의 몸속에는 한 생명이 자라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14년의 시간이 흘렀네여.
법흥왕이 그 ‘書石谷’에 왔습니다.▨作功臣, 禮臣, 作食人을 데리고 왔어요. ‘臣’자 보이시죠. 특히 禮臣,,,. 14년 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書石谷’이 신라왕실에 발견된 이래 이제 이곳에서 어떤 의식이 행해졌을 것입니다.
기록을 좀 볼까여.
過去乙巳年(525년, 법흥왕 12년)六月十八日昧沙喙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安郎三共遊來以後▨年八巳年過去妹王考妹王過人 // 蔚州川前里刻石-追銘
지난 乙巳年(525년, 법흥왕 12년) 6월 18일 새벽(昧) 沙喙部徙夫知葛文王과 妹와 於史鄒安郎 셋(3)이 함께 놀러온 이후 ▨年八巳年過去(저는 ‘▨年八巳年過去’을 ‘乙巳年으로부터 8년 지나’ 정도를 의미하는 문장으로 이해합니다.) 妹王考妹王過人[번역 : 妹와 王이 죽었다. 妹와 王은 過人(普通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참고 :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키는 해가 壬子(532)년이니 乙巳年으로부터 8년 뒤면 가야가 멸망한 후 1년 후입니다. 저는 徙夫知葛文王의 죽음이 혹시 가야의 멸망과 상관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더 적으면 소설의 세계로 gogogo....)
丁巳年(537년, 법흥왕 24년)王過去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 // 蔚州川前里刻石-追銘 이 문장에서 왕은 법흥왕이고, 其王은 徙夫知葛文王이고, 只沒尸兮妃는 於史鄒安郎이죠. 그러니 법흥왕은 사랑스러운 딸이 자꾸만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꾸만 심했을 것입니다.
법흥왕은 이제 결단을 내립니다.
왕은 徙夫知葛文王과 於史鄒安郎이 처음(?) 사랑을 나누었던 그 곳에 14년이 지난 후 손자이자 조카인 深▨夫知를 데리고 갑니다. 아마 이 때 深▨夫知의 나이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14세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己未年(539년, 법흥왕 26년) 七月 三日 대낮[興]에 왕실가족과 함께 논의하고 의결한 뒤 禮臣을 앞세워서 산천 천지에 포고하고 제의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 후 1년이 지나 법흥왕을 이어 진흥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감사합니다. ver. 0. 0228. 0320
잡담 :// 另卽知太王과 徙夫知葛文王의 여동생(徙夫知葛文王의 입장에서 友妹)의 이름이 무엇일까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