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7년전] 일연이 부르는 노래 구지가를 들여 드립니다

livemiri 2010. 4. 8. 03:20
livemiri (2010-04-06 21:41:19)
livemiri (2003-03-14 13:48:22)


일연이 부르는 노래 구지가를 들여 드립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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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보(步)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
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甲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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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은 그의 저서에서 가락국기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바로 그 것이 南齊書 卷五十八 列傳 第三十九 蠻 東南夷傳에 기록되어 있는 가라국(加羅國)의 왕력입니다. 한 갑자의 절반인 30을 이용하여 기년을 보정하면 정확한 생물학적인 왕들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왕은 가실왕으로 고쳐 읽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 삼국사기의 기록을 볼까요.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19년, 금관국주 김 구해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 구형왕(仇衡王) 김씨(金氏). 정광(正光) 2년에 즉위. 치세는 42년.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 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 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으니,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세연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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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와 <가락국기>에 인용된 <개황록>은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기록인 것 같은데요. 둘 다 임자년(532년)에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livemiri ==> 여기서 일연이 언급한 <삼국사>는 바로 삼국사기이기 때문입니다. )

일치하지 않는 다른 기록은 <가락국기> 본문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진흥왕 때인 임오년(562년)에 가락국이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락국기> 저자가 대가야가 멸망한 해를 가락국(금관국)이 멸망한 해로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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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 거등왕 조를 보면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으로 김으로 성을 삼았다."고 했음.이라고 나와 있는데 일연선사는 당시 가라국의 왕력이 기록되어 있는 text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연은 그 비밀의 코드를 자신의 삼국유사 속에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제가 지목하는 것은 삼국유사 남해왕 기록에 남아 있는 다음의 글입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 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삼국사기를 볼까요.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勿王{奈勿王}> 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照知&王{麻立干}> 之再從弟也. 母, <金>氏<鳥生>夫人, <訥祗王>之女; 妃, <朴>氏<延帝>夫人, <登欣>伊 女. 王體鴻大, 瞻{膽} 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曰『左』·『漢』, <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 "·<匈奴>語"撑犁孤塗"等. 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

지증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이다.[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라고도 한다.] 그는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 아우가 된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이며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연제부인이며 등흔 이찬의 딸이다. 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다. 전 임금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의 왕 가운데 거서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하나이며, 차차웅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하나, 이사금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열 여섯, 마립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넷이다. 신라 말년의 명유 최 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에서는 이들을 모두 왕이라고 불렀고, 거서간 등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 용어가 천박하여 부를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길 것인가? [좌전]과 [한서]는 중국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오히려 초나라 용어인 '곡오도( 於 )'와 흉노 용어인 '탱리고도(撑梨孤塗)'라는 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제 신라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방언을 그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또한 옳다고 생각한다.

맨 앞에 있는 글입니다.
1에서 3을 이루고 그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잡담> 1은 일본서기이고, 3은 삼국사기입니다. 그렇다면 7은 우리는 이제 다시 일본서기로 돌아 가야합니다. ㅋㅋㅋ^^ 일본서기는 신무의 건국기원을 기원전 660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기까지입니다.









<일부 생략>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일본서기는 그 [구지]를 같이 알아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