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일본서기에 대한 기년 이해와 4~5세기 묘제
livemiri
2010. 7. 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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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기년에 대한 이해가 저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님은 일본서기의 기록(신공기, 응신기 등)에서 간지가 가지고 있는 주기라는 특성으로 인해 획일적(?)으로 간지를 2주갑(120년) 인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태세간지를 기준으로 60년이나 120년 등 60의 배수를 이용하여 일본서기의 기년을 보정하는 것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귀무가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앞서도 제가 언급하였듯이 일본서기는 기전체(편년체)의 사서이며, 모든 기록은 시간의 흐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특정부분의 몇 개의 기록을 2주갑 인하한다는 것은 그 시간의 흐름에 왜곡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서기에서 설정된 태세간지를 통하여 서기연도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아요. 신무원년 = 서기전 660년 ..... 신공섭정 원년 = 서기 201년 신공섭정 69년 = 서기 269년 응신 원년 = 서기 270년 응신 41년 = 서기 310년 인덕 원년 = 서기 313년 ..... 만약 2주갑 인하를 한다면 아래와 같이 되어야합니다. 신무원년 = 서기전 600년 ..... 신공섭정 원년 = 서기 321년 신공섭정 69년 = 서기 389년 응신 원년 = 서기 390년 응신 41년 = 서기 430년 인덕 원년 = 서기 433년 .....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하면 일본서기 전체기록이 한꺼번에 120년이 인하되어야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일본서기에 대하여 조금 비유를 해보면, ///// 여기 잘 늘어지는 고무판에 멋진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고무판에 아무런 힘을 주지 않은 상태라면, 그 그림의 본래 모습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몇 개의 손이 여러 방향에서 힘을 작용한다면 고무판의 그림은 일그러져 버립니다. ///// 제가 이해하는 일본서기가 바로 ‘잘 늘어지는 고무판에 그려진 그림’이라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 방향에서 작용하는 힘’이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잇는 태세간지(연도기록)나 천황의 재위연수(수명)입니다. 그 재위연수를 30의 배수를 이용하여 줄이게 되면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상적으로 돌아온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분묘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것으로 적석목곽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묘제는 경주를 중심으로 일정한 영역에서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4세기 중반쯤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전 단계의 묘제와는 연결고리가 크지 않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연구자들 사이에는 고구려의 영향으로 발생하였다는 주장도 있고, 신라 김씨들이 외부에서 들어온 증거라는 주장도 있고,... 등등 분명한 것은 이 당시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 사이에서 묘제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신라본기의 왕력을 복원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님이 소설적 상상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뭐 할 말이 없습니다.) 1.혁거세---2.남해---3.유리---4.파사---5.지마---6.일성---7.아달라---8.탈해---9.벌휴---10.내해---11.조분---12.첨해---13.유례---14.기림---15.흘해---16.미추---17.내물---18.실성---19.눌지---20.자비---21.소지---22.지증왕 저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16대 흘해이사금’의 연대기는 ‘신라 16대 미추왕’의 연대기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추가 신라왕에 재위한 연대는 제가 보정한 왕력에 따르면 서기 310년 ~ 356년입니다. 신라 김씨의 왕위세습이 미추왕에서 시작하니, 바로 4세기 초,중엽입니다. 신라의 적석목곽묘 또한 이와 비슷한 4세기 중엽(정확히는 ??)에 나타납니다. 미추왕이 신라의 왕권을 장악하기 전에도 그들의 선조들은 경주 땅에서 죽 살아왔을 터인데, 경주 땅에 살던 신라 김씨들이 왕권을 장악한 후에는 묘제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전에 사용하던 묘제문화를 버렸다는 것이지요. 님이 지적한 것과 같이 4~5세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묘제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응신을 위시한 망명객들이 일본열도로 흘러들어간 후,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묘제문화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고 판단합니다. 고고학에서 이루어낸 성과를 문헌사학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시기 신라인들이 왕권을 장악한 후 묘제의 양식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열도로 망명을 떠난 임나가라인들도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자신들의 묘제양식을 버리고 일본의 일부가 되어 갔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망명초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응신이 죽은 후 거대한 분묘가 만들어졌을까?’에도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여튼,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왕조를 개창한 이 후 그들이 왜인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倭인들의 문화 속으로 동화되어 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임나의 왕이 일본천황이 되었다.’는 것이 문헌에 떡하니 기록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다면 제가 일본서기를 눈이 빠지게, 뚫어지라 쳐다보지 않아도 되는데,.... 저의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저의 주장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에 근접한 판단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소설적 상상이라고 판단하든,.. 그 것은 제 글을 읽는 분들의 자유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읽는 분들이 스스로 판단하시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단지 ‘과거 이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본모습’을 보고픈 것이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