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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섭정5년조의 微叱己知波珍干岐와 46년,47년조

livemiri 2010. 7. 26.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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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miri(2010-07-26 02:40:57, Hit : 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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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섭정5년조의 微叱己知波珍干岐와 46년,47년조
신공섭정5년조의 微叱己知波珍干岐와 46년,47년조





필자는 앞서 중애8년과 신공섭정전기(중애9년)의 기록을 분석하면서 ‘栲衾新羅國’은 ‘경주에 있는 신라국’과 다른 나라이며, 그리고 貴國과 전쟁을 한 ‘栲衾新羅國’의 왕은 一云에 보이는 宇流助富利智干임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신공섭정전기(중애9년) 동10월의 기록을 보면 新羅王 波沙寐錦과 귀국에 인질로 간 微叱己知波珍干岐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때 波沙寐錦과 微叱己知波珍干岐은 지금의 경주에 있던 신라왕과 그의 아들을 말한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波沙寐錦은 광개토대왕비문에 新羅寐錦으로 기록되어 있는 존재이며, 그가 바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 내물왕(재위 서기356~402년)과 미사흔(미해)이다.

이제 일본서기에서 중애8년과 신공섭정전기(중애9년)에 보이는 波沙寐錦과 微叱己知波珍干岐을 ‘栲衾新羅國’의 宇流助富利智干과 그의 아들(일본서기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로 바로 잡으면 이제 일본서기가 의도한 경주의 신라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별개의 사건으로 분리된다.



그런데 일본서기를 계속 읽어가다 보면 신공섭정5년의 기록을 만나게 된다. 기록을 보자.


『日本書紀』卷九 神功皇后攝政五年

五年春三月癸卯朔己酉。《七》新羅王遣汗禮斯伐。毛麻利叱智。富羅母智等朝貢。仍有返先質微叱許智伐旱之情。是以誂許智伐旱而紿之曰。使者汗禮斯伐。毛麻利叱智等告臣曰。我王以坐臣久不還而悉沒妻子爲孥。冀 還本土。知虛實而請焉。皇太后則聽之。因以副葛城襲津彦而遣之。共到對馬宿于鋤海水門。時新羅使者毛麻利叱智等。竊分船及水手。載微叱旱岐令逃於新羅。乃造蒭靈置微叱許智之床。詳爲病者。告襲津彦曰。微叱許智忽病之將死。襲津彦使人。令看病者。旣知欺而捉新羅使者三人。納檻中以火焚而殺。乃詣新羅。次于蹈鞴津。拔草羅城還之。是時俘人等。今桑原。佐糜。高宮。忍海。凡四邑漢人等之始祖也。


貴國은 신공섭정전기(중애9년)에 보이는 전쟁을 경주에 있던 新羅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록은 명백히 허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402년 3월에 實聖과 왜국(이 倭國이 바로 貴國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배한 후 일본열도로 망명을 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나라이다.)이 우호를 맺으며 미사흔(미해)은 왜국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실성이사금이 죽고 訥祗(재위 서기417~458년)가 즉위한 뒤인 서기418년(눌지왕 2년)에 박제상의 도움으로 신라로 돌아온다. 사건의 진상이 이러하니, 이제 신공섭정5년에 보이는 기록을 떼어내어 원래의 위치로 보내면 된다.


그런데 위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5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신라의 사신 3명
汗禮斯伐
毛麻利叱智
富羅母智

그리고, 葛城襲津彦(襲津彦)이 3번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 신라로부터 데려온 인질
微叱許智伐旱(微叱己知波珍干岐)

그런데 微叱許智伐旱(微叱己知波珍干岐)은 문장 속에서 5번 거론되는데, 이상하게도 인명표기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다. 살펴보면 微叱許智伐旱이라는 표현 이외에,
許智伐旱이 1번
微叱旱岐가 1번
微叱許智가 2번
이렇게 총 5번이다.



일본서기는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 기록을 남겼을까?

필자 스스로에게 내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신공섭정 46년 춘3월’과 ‘47년 하4월’의 기록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일관성이 없는 왕자의 이름과 일관성이 있는 新羅라는 國號를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원문을 살펴보자.

★『日本書紀』卷九神功皇后攝政四六年(丙寅二四六)三月乙亥朔◆四十六年春三月乙亥朔。遣斯摩宿禰于卓淳國。〈斯麻宿禰者。不知何姓人也。〉於是。卓淳王末錦旱岐告斯摩宿禰曰。甲子年七月中。百濟人久■。彌州流。莫古。三人到於我土曰。百濟王樸方有日本貴國。而遣臣等令朝其貴國。故求道路以至于斯土。若能敎臣等令通道路。則我王必深德君王。時謂久■等曰。本樸有貴國。然未曾有通。不知其道。唯海達浪嶮。則乘大船僅可得通若雖有路津。何鎰達耶。於是久■等曰。然卽當今不得通也。不若更還之。備船舶而後通矣。仍曰。若有貴國使人來。必應告吾國。如此乃還。爰斯摩宿禰卽以■人爾波移與卓淳人過古二人。遣于百濟國慰勞其王。時百濟肖古王。深之歡喜而厚遇焉。仍以五色綵絹各一疋。及角弓箭。幷鐵■四十枚。幣爾波移。便復開寶藏。以示諸珍異曰。吾國多有是珍寶。欲貢貴國不知道路。有志無從。然猶今付使者。尋貢獻耳。於是爾波移奉事而還告志摩宿禰。便自卓淳還之也。
★『日本書紀』卷九神功皇后攝政四七年(丁卯二四七)四月◆四十七年夏四月。百濟王使久■。彌州流。莫古。令朝貢。時新羅國調使與久■共詣。於是。皇太后。太子譽田別尊。大歡喜之曰。先王所望國人今來朝之。痛哉不逮于天皇矣群臣皆莫不流涕。仍檢校二國之貢物。於是新羅貢物者珍異甚多。百濟貢物者少賤不良。便問久■等曰。百濟貢物不及新羅。奈之何。對曰。臣等失道至沙比新羅。則新羅人捕臣等禁囹圄。經三月而欲殺。時久■等向天而咒詛之。新羅人怖其呪詛而不殺。則奪我貢物。因以爲己國之貢物。以新羅賤物。相易爲臣國之貢物。謂臣等曰。若誤此辭者。及于還日當殺汝等。故久■等恐怖從耳。是以僅得達于天朝。時皇太后。譽田別尊。責新羅使者。因以祈天神曰。當遣誰人於百濟、將檢事之虛實。當遣誰人於新羅。將推問其罪。便天神誨之曰。令武內宿禰行議。因以千熊長彦爲使者。當如所願。〈千熊長彦者。分明不知其姓人。一云。武藏國人。今是額田部槻本首等之始祖也。百濟記云。職麻那那加比跪者。蓋是歟也。〉於是。遣千熊長彦于新羅。責以濫百濟之獻物。



46년 춘3월의 기록
1. 貴國이 斯麻宿禰를 卓淳國에 파견
(※ 그 전에 백제사신 久■, 彌州流, 莫古 등 3인의 탁순국 방문했다 돌아감)
2. 卓淳王 末錦旱岐가 斯麻宿禰에게 백제국 사신의 방문을 보고함
3. 斯麻宿禰가 ■人 爾波移와 卓淳人 過古를 백제국에 파견함
4. 百濟 肖古王이 爾波移에게 여러 진보를 주면서 貴國으로 가는 길을 물음
5. 爾波移가 탁순국에 돌아와서 斯麻宿禰에게 그 간의 사정을 보고함
6. 斯麻宿禰가 탁순국에서 貴國으로 귀환함

47년 하4월의 기록
1. 百濟의 사자인 久■, 彌州流, 莫古가 新羅國의 調使와 같이 貴國을 방문
2. 공물을 조사하니 백제와 신라 사이에 큰 차이가 발생
3. 그 이유를 조사를 해보니 신라가 백제의 공물을 중간에서 가로챔
4. 貴國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千熊長彦을 신라에 파견하여 책임을 추궁함

이 때 47년조의 기록을 잘 살펴보면 백제 사신의 대답에서 ‘沙比新羅’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원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對曰。臣等失道至沙比新羅。則新羅人捕臣等禁囹圄。經三月而欲殺。(대답해서 이르길, 臣等이 길을 잃어 ‘沙比新羅’에 이르렀는데, 신라인이 臣等을 사로잡아,........../생략)


이 ‘沙比新羅’를 新羅라는 표현이 보인다고, 경주에 있는 신라로 판단하면, 신공섭정47년조의 기록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위에 요약정리를 한 것에서 보인 것처럼 46년과 47년의 기록은 한강유역에 있던 백제가 경상도 남부에 있는 貴國에 사신을 파견하는 과정을 전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卓淳과 沙比新羅는 백제나 貴國의 사신들이 통행하는 길목에 존재했던 나라들이다. 아마 백제의 사신은 배를 타고 연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卓淳과 沙比新羅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앞서 신공섭정5년조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하나의 질문을 하였다.
필자가 얻은 답은 무엇인가?

신공섭정5년조가 ‘동일인의 이름을 다르게 표현한 것’과는 반대로 ‘중애8년조와 신공섭정전기(중애9년)조’나 ‘신공섭정47년조’는 新羅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동일한 이름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애8년조와 신공섭정전기(중애9년)조의 기록의 ‘栲衾新羅國’과 신공섭정47년조의 기록에 보이는 ‘沙比新羅’처럼 단 1번만 정확한 표현을 함으로써 명백히 경주에 있던 新羅는 아니라는 것을 밝혀놓았다. 결국 다른 나라를 적어놓았지만, 같은 나라라는 이미지를 풍겼다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ver. 0.00. ㅎㅎㅎ




사족 : 필자는 [‘栲衾新羅國=卓淳=沙比新羅’]라는 추론에 강한 필이 오지만, 아직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추론하는 작은 근거를 적어 보면,

1. 栲衾(たくふすま)이 卓淳(탁순, たくじゅん)과 음이 비슷하다

2. 栲衾新羅와 沙比新羅를 모두 줄여서 新羅라는 표현으로 중애8년조와 신공섭정전기(중애9년)조’와 ‘신공섭정47년조’를 기록했다. 그리고 卓淳은 중간(신공46년조)에 끼어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신라->탁순->신라’ 이러한 흐름이 전쟁 이후에 백제사신의 貴國방문으로 스토리가 흘러간다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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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내일 아침에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런지,..
여러분은 월요병 없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