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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정확한 이해 2 - 미추왕과 내물왕 그리고 木滿致

livemiri 2012. 5. 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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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miri(2012-05-07 14:41:20, Hit : 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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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의 정확한 이해 2 - 미추왕과 내물왕 그리고 木滿致
일본서기의 정확한 이해 2 - 미추왕과 내물왕 그리고 木滿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김씨 왕들의 선대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 <金>氏有國之始也./// 삼국사기 미추

<奈勿>[一云<那密>.]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 <末仇>角于{角干}󰄲; 母, <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末仇>, <末鄒{味鄒}>󰄲尼師柰{尼師今}󰄲兄{王}󰄲弟也.]///삼국사기 내물



위 즉위기록에서 末鄒와 奈勿 사이의 친족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仇道의 아들이 末鄒와 末仇이고 末仇의 아들이 奈勿이니, 末鄒와 奈勿은 ‘백부나 숙부’와 ‘조카’ 사이인 3촌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물왕 즉위기록에는 말미에 주석문을 달아 末仇와 末鄒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더 명확히 기록해 두었다. 사실 이 주석문이 없더라도 末鄒와 奈勿, 末鄒와 末仇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알 수 있는데도 삼국사기는 한 번 더 기록한 것이다.[末仇, 末鄒尼師柰 兄弟也.]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미추의 父에 대하여 ‘仇道葛文王’으로 그리고, 내물의 父는 ‘仇道葛文王 一作 未召王之弟 未仇角干’으로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즉 삼국유사는 내물의 父에 대하여 仇道葛文王을 먼저 기록해 두고 異說로써 ‘未召王之弟 未仇角干’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와는 전혀 다른 인식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연이 그 당시에 존재하던 신라왕력에 대한 자료를 비교하여 내물의 父를 仇道로 파악하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은 異說로 파악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김씨의 선대계보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 중 하나이다.(다음에,.,)



계속하여 실성의 계보를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實聖을 ‘閼智裔孫, 大西知伊湌之子’로 막연하게 기록하였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실성의 父를 未鄒王弟 大西知角干으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또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실성은 내물왕의 뒤를 이어 서기 402년에 왕위에 올라 15년간을 재위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미추왕의 딸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내물왕비와 실성왕비는 모두 미추왕의 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내물왕비(눌지의 母)에 대하여는 미추왕의 딸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실성왕비에 대해서는 阿留夫人으로만 되어 있어 그녀가 미추왕의 딸인지 아닌지는 판단을 할 수 없다.


이상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미추와 내물과 그 이후의 계보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미추왕은 서기 262년에 왕위에 올라 서기 284년에 薨하였으니 治世가 22년간이고, 내물은 서기 356년에 왕위에 올라 서기 402년에 薨하였으니 治世가 46년간이다. 위 내용에서 미추와 가장 가까운 형제나 자녀 손자들은 4말5초라는 시간 속에 모두 모여 있어 친족관계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런데 미추만 단독으로 3세기 중후반에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록을 보면 미추가 사망한 시점으로부터 내물이 사망하는 시점까지 118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리고 미추가 사망할 즈음에 내물왕비와 실성왕비가 될 두 딸이 태어났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그녀들은 내물이 즉위할 즈음에는 73세, 실성이 즉위할 때는 119세가 된다. 이 정도의 시간 간격은 자연인으로써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내물왕 이후의 가족이나 친족관계가 생물학적 나이에 불합리가 없다면 당연히 미추왕의 生沒연대가 과거로 소급되어 기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추왕의 재위기간을 내물왕 바로 앞으로 이동시키면 ‘자연인’ 미추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앞서 차례가 뒤죽박죽인 신라왕력을 원래의 자리로 바로 잡아주는 장치가 바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麻立干이나 尼叱今과 같은 왕호임을 주장하였다.





이번에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日本書紀』卷九神功皇后攝政四九年(己巳二四九)三月◆四十九年春三月。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則與久■等共勒兵而度之。至卓淳國。將襲新羅。時或曰。兵衆少之。不可破新羅。更復奉上沙白。盖盧。請增軍士。卽命木羅斤資。沙沙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但木羅斤資者。百濟將也。〉領精兵與沙白。盖盧共遣之。俱集于卓淳。擊新羅而破之。因以平定比自■。南加羅。喙國。安羅。多羅。卓淳。加羅七國。,,,이하 생략

★『日本書紀』卷九神功皇后攝政六二年(庚午二五○)二月◆六十二年。新羅不朝。卽年遣襲津彦擊新羅。〈百濟記云。壬午年。新羅不奉貴國。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新羅人莊飾美女二人。迎誘於津。沙至比跪受其美女。反伐加羅國。加羅國王己本旱岐。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至等。將其人民。來奔百濟。百濟厚遇之。加羅國王妹旣殿至。向大倭啓云。天皇遣沙至比跪。以討新羅。而繩新羅美女捨而不討。反滅我國。兄弟人民皆爲流沈。不任憂思。故以來啓。天皇大怒。旣遣木羅斤資。領兵衆來集加羅。復其社稷。,,,이하 생략

★『日本書紀』卷十應神天皇二五年(甲寅二九四)◆卄五年。百濟直支王薨。卽子久爾辛立爲王。王年幼。大倭木滿致執國政。與王母相婬。多行無禮。天皇聞而召之〈百濟記云。木滿致者是木羅斤資討新羅時。娶其國婦而所生也。以其父功專於任那。來入我國往還貴國。承制天朝執我國政。權重當世。然天皇聞其暴召之。〉 [참고 : 구이신왕 원년 = 서기 420년]


위 기록을 보면 신공섭정 49년(서기 249년) 신라를 공격하는 백제 장수 木羅斤資가 등장하고 應神 29년(서기 294년)에는 그의 아들 木滿致의 기록도 보인다. 그런데 기존의 통설에 따라 2주갑을 인상하여 일본서기의 기년을 수정한다면 木羅斤資는 3세기 중엽에 활동한 인물로 그리고 그의 아들 木滿致는 5세기 초에 활동한 인물이 되어 父子관계가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래서 일본서기의 기년을 이해하는데 2주갑인상이라는 방법론은 적합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필자는 앞서 일본서기의 기년을 복원함에 신공섭정 원년은 서기 381년으로, 응신 원년은 서기 390년, 인덕원년은 서기 403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기록된 응신 25년은 서기 390년에서 서기 402년 사이의 한 시점이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구이신왕의 원년은 서기 420년이다. 이것은 바로 일본서기가 기년을 재조정하면서 재조정된 기년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백제왕력을 삽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본기를 잠깐 살펴보자.

<久尒辛王>, <腆支王>長子. <腆支王>薨, 卽位.(서기 420년)
,,, 중간생략
<毗有王>, <久尒辛王>之長子.[或云: <腆支王>庶子. 未知孰是.] 美姿貌, 有口辯, 人所推重, <久尒辛王>薨, 卽位.(서기 427년)
,,, 중간생략
<蓋鹵王>[或云<近蓋婁>.], 諱<慶司>, <毗有王>之長子. <毗有>在位二十九年, 薨, 嗣.(서기 455년)
,,, 중간생략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 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중간생략,,,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木劦>․<祖彌>, 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南行焉. 至是, <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尒萬年>[<再曾>․<古尒>, 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己,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阿旦城}>󰄲下戕之. <桀婁>․<萬年>, 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也?” 曰: “<楊子>『法言』評此以爲不由德. 所謂德者, 仁與義而已, 則<子胥>之狠, 不如<鄖公>之仁. 以此論之,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서기 475년)

개로왕 21년 기사를 보면 文周와 같이 남쪽으로 도망가는 木劦滿致를 볼 수 있다. 이가 바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木羅斤資의 아들 木滿致이다. 이때가 서기 475년인데 그는 木羅斤資가 신라를 정벌할 때인 신공섭정 년간(서기 381~389년)에 태어났으니 개로왕 21년에는 바로 80정도의 노령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신공섭정기는 3세기 중반의 역사로 인식 할 수 없음이 명명백백하다.




서기 400년을 전후로 하여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인물들이 지나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자.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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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요즘은 뉴스 보기가 두렵더군요. 非理 덩어리들이 막 튀어 나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