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우리 상고사

旱岐,旱岐兒의 君,君兒로의 교체

livemiri 2010. 8. 9. 23:24
글쓴이
livemiri(2010-08-09 23:12:47, Hit : 0, Vote : 0)
제목
□□□□님/ 旱岐,旱岐兒의 君,君兒로의 교체
아래 인용한 글은 □□□□님이 첨부하신 글화일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인용
<일본서기> 541년 및 544년 기사를 비교할 때 旱岐․旱岐兒가 君․君兒로 교체됨은 /한히/가 추장(酋長, chief)뿐만 아니라 君(군)도 뜻함을 가리킨다.
///////인용 끝



□□□□님이 旱岐․旱岐兒가 君․君兒로 교체되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과 저의 시각은 많이 다릅니다. 저의 시각은 아래와 같습니다.


저는 旱岐․旱岐兒와 君․君兒의 교체를 통하여 新羅와 百濟의 정치적 역학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伽倻지역은 법흥왕에 의하여 신라에 병합됩니다.(서기 532년)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거나, 아니면 지역의 유력자를 책임자로 임명을 하였겠지요. 그래서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서기 532년 이후 旱岐가 등장합니다. 저는 旱岐라는 관등명을 신라가 내려준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伽倻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또 가야의 旱岐들도 신라에 대한 독립(임나부흥)을 요구하면서 백제에게 기대게 됩니다. 그 때 백제가 伽倻지역의 유력자들에게 ‘君’이라는 칭호를 내려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일본서기를 검색해보면 신공섭정기에서 ‘旱岐’라는 단어가 발견된 이후 다시 발견되는 것은 欽明天皇二年(서기541년)이 처음입니다. 이 때 가야지역은 신라에 병합된 상태입니다. 伽倻의 가실왕이 신라에 귀부를 한 이후 근 10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입니다.

●『日本書紀』卷十九欽明天皇二年(五四一)四月◆夏四月。安羅次旱岐夷呑奚。大不孫。久取柔利。加羅上首位古殿奚。卒麻旱岐。散半奚旱岐兒。多羅下旱岐夷他。斯二岐旱岐兒。子他旱岐等。與任那日本府吉備臣。〈闕名字。〉往赴百濟俱聽詔書。百濟聖明王謂任那旱岐等言。/////// 이하 생략


그렇다면 ‘君’은 무엇인가? 왜 ‘君’이 백제와 관련이 있는가?


雄略천황 5년의 기록에 있습니다.

●『日本書紀』卷十四雄略天皇五年(辛丑四六一)四月◆夏四月。百濟加須利君〈盖鹵王也。〉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女郞也。〉而籌議曰。昔貢女人爲釆女。而旣無禮。失我國名。自今以後不合貢女。乃告其弟軍君〈崑攴君也〉曰。汝宜往日本以事天皇。軍君對曰。上君之命不可奉違。願賜君婦而後奉遺。加須利君則以孕婦。旣嫁與軍君曰。我之孕婦旣當産月。若於路産。冀載一船。隨至何處速令送國。遂與辭訣奉遣於朝。
●『日本書紀』卷十四雄略天皇五年(辛丑四六一)六月丙戌朔◆六月丙戌朔。孕婦果如加須利君言。於筑紫各羅嶋産兒。仍名此兒曰嶋君。於是軍君卽以一船送嶋君於國。是爲武寧王。百濟人呼此嶋曰主嶋也。
●『日本書紀』卷十四雄略天皇五年(辛丑四六一)七月◆秋七月。軍君入京。旣而有五子。〈百濟新撰云。辛丑年盖鹵王遣王遣弟昆攴君。向大倭侍天皇。以脩先王之好也。〉


인명 + ‘君’으로 이루어진 많은 표현들을 볼 수 있습니다.


加須利+君
(其弟) 軍+君,(崑攴+君)
嶋+君

이 군이라는 표현은 백제인이 기록했을 것으로 예상하는 百濟新撰에도 ‘昆攴+君’으로 되어 있습니다.



결국 저는 일본서기에서 541년 및 544년 기사를 비교할 때 旱岐․旱岐兒가 君․君兒로 교체되어있는 것을 통하여 新羅가 병합한 伽倻지역에 백제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성왕때에 백제는 이전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찾기 위해 551년 삼국연합군을 형성하여 그 땅을 되찾았으나,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격해 차지함으로써 나제동맹은 파기됩니다. 아마 이러한 伽倻지역에서의 백제의 영향력이 커가는 것도 나제동맹을 파기하는데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게 아니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旱岐兒나 君兒에서 兒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즉 旱岐兒=[旱岐의 아들], 君兒=[君의 아들]

감사합니다.




추가/ 혹시 □□□□님의 출판물에 저의 사고가 반영되거나, 저의 글이 인용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