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假衣幘과 1세기 신라의 영역

livemiri 2012. 5. 14.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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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miri(2012-05-14 01:49:14, Hit : 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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假衣幘과 1세기 신라의 영역
假衣幘과 1세기 신라의 영역





아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景初中으로 시작하는 문장이다.


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이 문장에는 韓國의 풍속을 설명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경초년간에 위明帝가 韓國의 여러 臣智들에게 邑君印綬나 邑長(인수)를 하사한 이후의 풍속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혹시 韓人들 사이에 印綬衣幘하는 풍속이 있었기에 그 것을 이용하였는지,,,,) ‘其俗’에 ‘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이라고 되어 있다.

필자 번역 // 그 俗(부연 -- 이 俗의 의미가 한 순간의 유행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에 衣幘을 좋아하는데, 下戶가 郡에 이르러 朝謁함에 모두 假衣幘을 했다. 스스로 印綬衣幘한 자가 천여명이다.// 번역 끝

위 문장은 낙랑 대방을 찾아와 朝謁하는 사람을 下戶라 칭하고 있으며, 그들의 복장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부분이다. 이 문장에는 ‘假’라는 한자가 사용되었는데 이 노마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다. 그 중에 ‘가짜’라는 뜻도 있고 ‘빌리다’라는 뜻도 있다. 필자는 이 문장에 쓰인 假의 의미를 ‘가짜’라는 뜻으로 파악한다. 필자의 생각을 조금 적어 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필자는 분석할려고 하는 문장을 아래와 같이 크게 3부분으로 나누었다.

其俗 好衣幘,(그 俗에 衣幘을 좋아하는데,)
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下戶가 郡에 이르러 朝謁함에 모두 假衣幘을 했다.)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스스로 印綬衣幘한 자가 천여명이다.)



2번 째 문장을 보면 낙랑 대방을 찾아와 朝謁하는 자들이 모두 衣幘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것을 ‘빌려 입었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이어지는 3번째 문장이다. 스스로 印綬衣幘하는 자가 천여명이나 된다고 하니, 그 천여명의 印綬衣幘이 가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타당하다. 왜냐하면 경초년간에 위明帝가 韓國의 여러 臣智들이나 그 수행원들(?)에게 邑君印綬나 邑長(인수)를 하사하였는데, 이들은 바로 같은 한전에 기록되어 있는 安邪 踧支濆, 拘邪 秦支廉 그리고 辰韓八國의 신지 등,,,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낙랑 대방을 찾은 下戶 즉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은 바로 鐵을 장사 밑천으로 하여 낙랑대방을 찾은 사람들로써,(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 이들은 위明帝에게 직접 하사받은 印綬 衣幘을 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 입었으니(自服) 분명이 假(가짜) 印綬衣幘을 한 것이다. 그들이 郡에 朝謁하기 위하여 신지 등에게 印綬衣幘을 빌렸다(假)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한 추측이다.




진수가 기록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한전은 3세기의 한반도 남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韓人 천여명이 낙랑 대방을 찾아가서 상행위를 하는 모습도 그 중 하나이다. 이 당시 낙랑군은 국제무역항을 방불케했을 것이다. 남쪽에서 배를 타고 올라간 韓人과 왜인, 북쪽에서 내려온 맥인과 예인 또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漢人으로 북적북적 했을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이 韓의 영역을 다스리는 최고 지배자를 辰王(삼국사기의 석씨신라)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지배하는 영역을 진한12국과 月支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그 당시 辰王은 변한12국(가야)도 병합하여 다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들은 지금의 한반도 남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辰王(삼국사기의 석씨신라)이전의 신라의 영역 즉 박씨신라의 영역은 어디일까?




삼국사기를 펼쳐보면 그 속에 답이 있다.

조금 살펴보자.
////// 네이트 한국학 삼국사기에서 복사한 글
탈해이사금 5년(서기 61) 가을 8월에 마한의 장군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항복해 왔다.
탈해이사금 7년(서기 63) 겨울 10월에 백제 왕이 땅을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탈해이사금 8년(서기 64) 가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기병 2천 명을 보내 쳐서 쫓아보냈다. 12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탈해이사금 10년(서기 66)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200명을 머물러 두고 지키게 했으나, [신라가] 곧 그것을 빼앗았다.
탈해이사금 14년(서기 70) 백제가 침입해 왔다.
탈해이사금 18년(서기 74) 가을 8월에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므로 군사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탈해이사금 19년(서기 75)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탈해이사금 20년(서기 76)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하여 와산성을 다시 빼앗고, 백제로부터 와서 살던 사람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탈해이사금 21년(서기 77) 가을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가야(加耶) 군사와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목베었으므로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공로를 포상하였다.
파사이사금 5년(서기 84) 봄 2월에 명선(明宣)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允良)을 파진찬으로 삼았다. 여름 5월에 고타군주(古抒郡主)가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 남신현(南新縣)에서 보리줄기가 가지를 쳤다. 크게 풍년이 들어 여행하는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파사이사금 6년(서기 85) 봄 정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월에 길원(吉元)을 아찬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객성(客星)이 자미(紫微) [별자리]에 들어갔다.
파사이사금 8년(서기 87) 가을 7월에 영(令)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덕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여 있고 남쪽은 가야와 연접해 있다. [나의] 덕은 능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쌓았다.
파사이사금 15년(서기 94) 봄 2월에 가야의 적(賊)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였으므로 아찬 길원을 보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가서 공격하여 쫓았다. 가을 8월에 알천(閼川)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 삼국사기 번역문 출처 :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서기 7~80년 전후 백제와 신라 간에는 전쟁을 하고 있다. 한강유역에서 주변지역으로 팽창해 나간 백제와 경주지역으로부터 주변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두 세력이 동적인 세력평형을 이루는 지역이 삼국사기는 와산성(蛙山城)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와산성(蛙山城)이 어디일까? 이곳이 바로 삼국사기가 1세기 중후엽 신라의 西邊이라고 기록한 곳이다. 그리고 남으로는 가야와 접경을 이루는데, 신라는 가야의 침입에 대비하여 마두성(馬頭城)을 쌓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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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계절의 여왕 5월도 이제 중순으로 접어 들었네여. 5월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카시아 꽃이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때이기도 합니다. ㅋ내일 시간이 나면 아카시아 꽃을 따서 술을 좀 담갔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는데 시간이 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