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22 12:31:18)
답변 추가질문 4 : 저는 모르겠습니다. 일본서기 찬자가 왜 그렇게 했는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방법이 현재로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점쟁이는 그 이유를 알겠지요..
추가질문 5 : 모르겠습니다. 기록의 공백이라고 봐야 겠죠. 아니면 이것도 점쟁이에게 물어보거나..
주가질문 6 : 120년 공백을 두고 안두고가 무내숙내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어떻게 계산하더라도 정상적이지 않은데... 일본서기 책대로 계산하면 신공이전에만도 이미 경행때 57년 + 성무때 60년을 살았습니다. 이미 신공왕후대의 2주갑인상, 인하와 관계없이 비정상적입니다. 신공이후만 보면 인덕50년 + 응신109년 만 해도 160년 살았던 사람이고...
무내숙내를 들고와서 2주갑이 맞니 안맞니 하는 이야기는 별로 호소력이 없는 질문인듯하군요..
livemiri 曰 점쟁이에게 일본서기의 기록을 물어봐야 할 사람과 토론을 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군요. 그럼 님이 이제까지 주장한 60년이니 2주갑이니 하면서 일본서기나 일본서기 신공기의 연대를 주장한 것은 모두 점쟁이에게 물어서 토론을 한 것 입니까?
일본서기의 기년이 변형되어 있으면 그 변형되어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올바로 보정할 수 있어야합니다. 나는 그 것이 바로 왕력에 추가되어 있는 30의 배수, 그리고 간지기록으로 추산한 재위년수와 각천황기 본문에 나타나는 차이를 통하여 올바로 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 기년을 복원하는 방법이 ‘옳은가? 옳지 않는가?’가 중요하죠.
님은 신공기의 일부에 대하여 2주갑인하가 일본서기를 이해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의 주장은 2주갑인하라는 것도 일본서기를 이해하는 하나의 가설이지만, 그 것이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武內宿禰를 언급한 것은 2주갑이 ‘맞니? 안맞니?’를 주장하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복원해본 기년으로 武內宿禰의 생물학적 생몰연수가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님의 글에 보이는 것처럼 경행 성무 인덕 등의 천황에게 부풀려져 있는 재위년도(또는 생몰연수)를 내가 복원한 방법으로 빼보면 알 것입니다.
추가질문 7 : 일본서기와 고사기 두곳의 일본고대사서에 다른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저는 서기 700년 무렵에 작성된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뛰어넘어 일본고대사를 알 재주가 없기 때문이지요. 추가질문 7-1 7-2 : 답변 이미 함
livemiri 曰 나는 응신과 신무를 동일한 사람으로 이해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연구자 중 다수가 그렇게 이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일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합리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토론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합니다. 서로가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데 토론이 진행될 수가 없지요. 나의 주장은 ‘응신과 신무가 동일인이다.’는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응신과 신무가 동일인이니 신무(=응신)의 아들은 綏靖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대 천황의 자리에 있어야할 천황이 비어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응신(=신무)은 4말5초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빈자리에 맞는 이름이 무엇일까요?
추가질문 8 : 사서에 의하면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일본서기 모두 가야가 독립된 단일국가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기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열전이나 잡지를 보시지요. 과연 단일국가로 묘사하고 있는지 아닌지... 여타 모든 기록이 "버글버글"하다고 기록하고 있죠.
livemiri 曰 좀 더 부연 설명을 할까요? 삼국지위지 동이전 한전을 보면, 진한이 12개국 변한이 12개국입니다. 이 12개국의 의미가 그 당시 진한(신라)과 변한(加耶)의 지방통치구역(중국의 군현제)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加耶를 구성하는 지방통치구역(중국의 군현제)으로 卓淳국, 安羅국, 多羅국 등등(즉 변한12국)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이 加耶가 ‘포상팔국전쟁 이후 멸망하고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개화,숭신~중애,신공섭정 사이에 독립을 하게 되는 과정에 "버글버글"한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에요.
나의 주장을 다시 한번 정리할까요? 1. 加耶국이 있었다. -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것처럼 12개국(지방통치구역)으로 구성 2. 이 加耶가 신라에게 멸망을 당했다. - 포상팔국전쟁 3. 석씨에서 김씨로 미추에서 내물로 신라의 왕권이 바뀌는 시기 이 加耶지역에는 여러 소국이 버글버글 생겨나기 시작하여 이합집산을 한다. 그 나라에 貴國도 포함되어 있다. - 개화,숭신~중애,신공섭정 사이(서기 354년 ~ 대충 385년정도) 4. 이 貴國이 옛 加耶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후 백제와 연합하고 신라 고구려와 한판 전쟁을 한다. // 이후 나의 주장은 앞의 글에 다 있어요.
추가질문 9 : 헛다리를 누가 짚고 있는지 판단은 유보하고요..."6세기에도 신라에는 왕들이 버글버글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포상팔국이후에 사서에는 버글버글하게 나옵니다. 혹시 일본서기 집에 없나요? 한번 보세요.
livemiri 曰 일본서기 기년을 점쟁이에게 물어본다는 분이 일본서기에 포상팔국전쟁 이후 加耶지역에 소국들이 버글버글하게 나온다고 주장하니 영 이해가 안가네요. 그래서 나는 일본서기의 기년이 아주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이에요.
일본서기를 보면 숭신 65년조에 처음으로 임나가 기록되어 있어요. 내가 복원해 본 崇神원년은 서기 354년이고 말년은 서기 361년으로 8년을 재위했어요. 그럼 대충 일본서기에 加耶지역에 소국들이 버글버글 나타나는 시기가 4세기 중순이네요.
그럼 님이 보고 있는 일본서기에는 언제부터 버글버글한 가야소국이 기록되어 있지요? 님이 이해하는 숭신원년은 언제죠? 그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일본서기 있는 곳입니다. http://www013.upp.so-net.ne.jp/wata/rikkokusi/
추가질문 10 : 별로 답하고 싶지는 않지만,,, 신라가 4세기에 한반도 남부 대부분을 장악했다고 벽골제의 부분을 가지고 얼토당토않게 확대해석한 것이라 답변드리죠. 고고학자들도 4세기에 신라가 한반도 남부를 장악했다고 보는 사람은 전무할 겁니다. 즉 위의 주장은 천재의 혼자만의 주장인 듯(일도안사 한분 더 있군요...)
livemiri 曰 내가 확대해석을 했다구요? 삼국사기가 기록한 벽골제는 지금의 전북 김제에 있고, 다사군은 지금의 섬진강 유역이예요. 지금의 통설에 따른다면 삼국사기의 이 기록들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해요. 그래서 아마 이 기록이 없었으면, 이 기록이 엉터리였으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이 부분은 내가 앞으로 다시 언급한다고 먼저 말했어요.
문헌사학과 고고학이 충돌을 하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나는 정치적으로 실효지배(?)를 하는 것과 문화권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봐요. 삼국사기는 신라가 4세기 전기에 지금의 전북 김제나 섬진강 유역(다사군)을 실효 지배했다고 적어 놓았어요. 만약 신라가 그 지역에 사람들을 확 몰아내고(흐미 인종청소?) 진한지역의 사람들을 왕창 옮겨 살게 했다면 고고학적으로 어떤 유물이 나올 것 같아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마한이나 진한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고 적어 놓았어요. 아마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그 땅에서 나오는 유물에 큰 차이가 있을까요? 다 같이 토기며, 철기, 목기 이런 것들이 발굴되잖아요. 고고학자들이 그 계통을 따져 백제계니, 마한계니, 신라의 모습이 좀 보인다느니 하잖아요. 이처럼, 지금의 고고학은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발굴되는 유물이라면 그냥 백제나 마한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는 문헌사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추가질문 11 : 신찬성씨록의 귀국 기록의 앞뒤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백제가 귀국이라 부른곳과 임나가 귀국이라 부른 곳이 같습니다.
livemiri 曰 내 말이 그 말 아닌가요?
제가 드린 질문에도 답을 해 주시죠. 답변대신 엉뚱한 질문을 나열하는 것에는 반대입니다.
livemiri 曰 내가 앞서 질문한 ‘추가질문 4,5,6’에 대하여 님은 ‘전혀모르겠다. 점쟁이에게 물어봐야 된다.’라고 대답을 하였어요. 그렇다면 님의 질문에 내가 아무리 답변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수로왕과 綏靖, 居登王의 기년문제가 일본서기와 가락국기 사이에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나의 글에서 그 기년을 복원하는 방법을 자세히 적어 놓았어요. 예전에도 말을 했지만 떡을 쳐서 자식을 낳으면 아비와 자식 사이에 적절한 나이차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서기와 가락국기는 그 차가 심하죠.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일본서기와 가락국기의 기년은 정을 맞고 보정이 되어야 하는 기록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추가질문 5 : 모르겠습니다. 기록의 공백이라고 봐야 겠죠. 아니면 이것도 점쟁이에게 물어보거나.. - 옛과객
그리고 님의 말처럼 신공섭정기에 기년의 공백이 있다면??? 비미호(신공기 전반부)가 일본열도에서 왕을 한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신공기 전반부에서 ‘신공기 후반부+응신’ 사이에 기년의 공백기가 있고 그 때는 일본열도에 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인가요? 그러면 신공기 후반의 기록은 누구의 기록이며, 이 기록의 주인공과 응신은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났는지요? 하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나의 주장은 일본서기에는 기년의 공백이 없고, 그 기록은 부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신의 전반부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고, 그가 전쟁에 패하여 일본열도로 망명했고 그 것이 일본 천황가의 기원이라고 한 것이에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加耶의 기록은 탈해이사금 21년을 시작으로 奈解尼師今 17년조까지 10개 정도가 있습니다. 그 후 炤知麻立干 때가 되어야 加耶가 다시 보입니다.
脫解尼師今 二十一年, 秋八月, 阿湌<吉門>, 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湌, 賞功也. ... 奈解尼師今 十七年, 春三月, <加耶>送王子爲質. 夏五月, 大雨, 漂毁民屋.
이 기록들(탈해이사금 21년을 시작으로 奈解尼師今 17년조까지)이 □□, 綏靖, 安寧, 懿德 등의 행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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