薛聰의 가계와 薛氏의 기원




설총은 신라의 명문장가이며, 또 한자의 뜻과 음을 빌려 우리말로 적은 '이두'를 집대성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 그의 生沒年月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태종무열왕 때인 654∼657년 사이에 태어나 景德王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설총의 가계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薛聰>, 字<聰智>, 祖<談捺>奈麻, 父<元曉>.[薛聰의 字는 聰智이다. 할아버지는 奈麻인 談捺이며, 아버지는 元曉이다.]”이다.



자 이번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元曉不羈

聖師元曉. 俗姓薛氏. 祖仍皮公. 亦云赤大公. 今赤大淵側有仍皮公廟. 父談捺乃末.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 佛地村北, 栗谷娑羅樹下.[聖師 원효의 俗姓은 薛氏이다. 할아버지는 仍皮公 또는 赤大公이다. 지금 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아버지는 談捺乃末이다.원효는 처음에 押梁郡의 남쪽(今 章山郡) 佛地村 북쪽 栗谷의 裟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娑羅樹者. 諺云. 師之家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 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娑羅樹. 其樹之實亦異於常. 至伕稱娑羅栗. 古傳. 昔有主寺者. 給寺奴一人, 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官吏忄在之. 取栗檢之. 一枚盈一鉢. 乃反自判給一枚. 故因名栗谷.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曰娑羅. 師之行狀云. 是京師人. 從祖考也. 唐僧傳云. 本下湘州之人.[스님의 行狀에는 서울사람(京師人)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돌아가신 할아버지(祖考)를 따른 것이고, 唐僧傳에는 본래 下湘州 사람이라고 이른다.] 按麟德二年間. 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 置歃良州. 則下州乃今之昌寧郡也. 押梁郡本下州之屬縣. 上州則今尙州. 亦作湘州也.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初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丁丑歲也. 生而穎異. 學不從師. 其遊方始末, 弘通茂跡. 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鄕傳所記有一二段異事. <이하 생략>

설총의 가계에 대한 내용은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보다 삼국유사가 조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하면

仍皮公(亦云赤大公) - 談捺(乃末) - 元曉 - 薛聰(字聰智)

으로 이어지는 세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行狀을 인용한 기록을 통하여 원효의 祖考는 서울사람(京師人)이라고 밝혀놓았다.





이제 薛氏의 기원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館陶郭公姬薛氏墓誌銘幷序

姬人姓薛氏 本東明國王金氏之胤也 昔金王有愛子 列食於薛 因姓焉 世與金氏爲姻 其高會皆金王貴臣大人也 父永沖有唐高宗時 與金仁問歸國...<이하 생략>
[姬人의 성은 설씨다. 본래 東明國王 金氏의 자손이다. 옛날에 金王은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薛땅을 식읍으로 주었는데 그로인해 성이 되었다. 대대로 김씨와 더불어 혼인하였으며, 그의 고조와 증조는 金王의 貴臣大人이었다. 아버지 永沖은 唐高宗 때 仁問과 더불어......<이하 생략>]

자세한 내용은 ///노중국의 新羅時代 姓氏의 分枝化와 食邑制의 實施 -薛瑤墓誌銘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제15권, 1999. 5]///를 참조하기 바람


참고 :
묘지명을 보면 설요는 대략 660년경에 태어났다. 15세인 675년경 아버지가 죽자 산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였다. 20세 무렵인 680년경에 〈返俗謠〉를 짓고 하산해 당시의 유명한 시인이기도 했던 郭震(字는 元振)의 첩으로 10년 정도 살다가 693년에 사망, 通泉縣 惠善寺 근처에 묻혔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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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vem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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